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개혁주의 자료 2017. 2. 11. 03:52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1. 들어가면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단히 성경을 공부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딤전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하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모두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limited salvation)을 강조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마1:28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요6:37, 눅19:10) 성육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입니다(빌2:6-8).

이런 이유로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바른 계시관의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10:17). 때문에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제아무리 은혜롭게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의존적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설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된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마7:21-23, 롬10:2-3). 문제는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천상적 시각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적 의미를 세상적 관점과 질서 속에서 접근하게 될 때, 거기에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의 신앙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좁은 길의 신앙여정과는 무관합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만큼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으로서 세상만사와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창2:17, 3:6)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4:4)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창1:28)은 지속적으로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사역에 집중될 때(요5:39, 딤후3:15-17),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경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찾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의 종국에 가서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무지하거나 왜곡 및 곡해현상은 사이비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목회에로의 귀결이 불가피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와지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입니다(롬1:21-23). 결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의 형성입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유사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기독교 신앙관은 찾기 힘듭니다. 불법적(마7:21-23)이고 불복종적(롬10:2-3)인 자의적 숭배 신앙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바른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계시의 총화가 무엇인 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로서의 천국사상이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관의 궁극적 목표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구현을 위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설파합니다(전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전12:14, 고후5:10, 히9:27, 계20:11-15).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계시의 총화인 사실의 정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공교하게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이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고 실제적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맛보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그래서 현세와는 단절된 사후세계에 속한 나라(that world)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 진행적(this world, 마12:28, 눅17:20-21, 마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눅17:22-24, 22:14-18, 마25:31-33)인 이중적 국면을 띠고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2:31-46). 거기에서 각기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그래서 신적기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 내용입니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후자는 신적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합니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통치의 세상나라를 대치합니다. 이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을 통해, 세상역사의 종식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란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서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집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편집방향성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처음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합니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 말입니다(히3:4). 그런데 계21:1을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창1:1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초의 천지창조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창조사역으로 갱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벧후3:10-13, 마19:28, 사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 세상(this world)의 창조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that world)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선언(宣言)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4:17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본문에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 속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진행형적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막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능력이 현재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와 병자의 치유 및 축사(逐邪)사역, 그리고 천국복음의 증거와 죄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명백한 표적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귀결됩니다.

넷째로, 소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6:33)을 천국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고 선포하시는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사상이야말로 성도들의 존재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섯째로, 동일한 산상수훈 속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6:9-10)에 대해 집중해 기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구현’(고전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것이 확실하기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경륜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와지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啓示)의존적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합니다(고후5:17, 엡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본질에 있어서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합니다. 골1:13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본질에서 이미 천상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합니다(엡2:6).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삶으로 간주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관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관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막7:6-8, 마7:21-23, 롬10:2-3, 딤후3:15-17, 딤전2:4, 요삼4절, 엡4:11-13).

2. 펼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계획을 성경저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역사를 무대로 섭리적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언약(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킵니다(엡1:4-6).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신적(神的, divine)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신적 언약을 중보적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적 구속계시의 본의(엡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나머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①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창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전12:13, 요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창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6, 벧후2:4, 사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창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不許)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갈4:4).

④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更新)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엡1:4, 행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창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창6:8-9, 히11:8, 엡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묵계(黙契)적으로 시사합니다. 창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⑥노아의 본존언약(창9:8-10, 1-2절)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6:5)이라고 고발합니다.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합니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합니다. 노아를 포함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9:8-10). 이 언약을 일컬어 노아의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부부와 맺었던 창조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의 보존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의 내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창9:1-2). 물론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창11:10, 26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창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서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습니다(창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사건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과 배도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되었다가(창11:1-2, 단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계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적 시험과 반역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습니다.

⑦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인 아브라함 언약(창12:1-3)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10:22, 11:10) 및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11:24-26),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4장-11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暗黙적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明示)적으로 바뀝니다. 은닉(隱匿)적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람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직접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12:1-3).

아브람 언약의 대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창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지향적이던 삶을 천상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마6:33).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고전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무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4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창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4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착 없이 전개됩니다. 이들 각각의 성취내용을 우선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神政)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상12:25-33). 첫째, 하나님의 도구화 및 우상화 작업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됩니다. 대신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적 사이비 신앙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자의적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롬10:2-3, 마7:21-23). 둘째, 자의적 숭배신앙의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모세 율법에 정한 대로 레위지파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임의대로 제사장에 봉직시킵니다(대하11:13-16).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철저히 무시되는 패역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의 배출과 목회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교인의 양산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유유상종해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셋째,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의 문제입니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정해서 드리는 절기를 임의대로 변경해 적용시킵니다. 특별히 7월 15일로 정해져 있는 초막 절기를 8월 15일로 변경해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날짜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습니다.

남왕국 유다 또한 본질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의 경호원들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유다 마저 바벨론의 3차(BC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됩니다(렘25:1-9, 대하36:17-20).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렘25:8-13, 29:10-14, 30:1-3, 겔37:21-22, 사14:1-3). 이는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축복했던 야곱의 예언이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면 다윗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⑩선지자들의 새 언약(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40:1-2, 42:9, 61:1-3)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남유다 왕국의 패망은 특별히 유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 및 통한의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적어도 다윗언약에 근거하면 남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망정 어떤 경우라도 결코 멸망당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자 하박국마저도 유다의 패역과 간악함을 마땅히 징치해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없는 이방 갈대아 인(바벨론)을 채찍삼아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기막힌 사실 앞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거침없이 항변했던 것입니다(합1:1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박국의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해 줍니다. 렘25:12-13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이런 예언의 말씀은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들이 고토로 귀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스1:1-4).

그렇습니다. 다윗언약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관련해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 구조적 성격에 대해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언약을 포함해서 제반 신적언약의 중심 사상들이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 속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전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들 중,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맞춰 선포한 예언들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새 언약’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이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시내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철저하게 멸망을 선고받을지라도 다윗언약에서 시사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조만간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해 주실 것과 아울러, 보다 미래적인 종말론적 회복을 예시(豫示)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신(新)다윗 왕조의 재건과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신정왕국의 회복을 지향합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특별히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등 세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

첫째,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렘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기 전, 먼저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이런 남 유다의 회복을 북 이스라엘에게 확대 적용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언약 안에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부각시킴으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십니다(렘25:7-10). 그러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고 70년으로 제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1절). 이는 유다의 회복을 보증하시는 말씀(렘29:10-14, 30:1-3)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70년이 찰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 중 일단의 무리를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으로부터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남은 자’(remnant)라고 명명합니다(렘23:3).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친 백성을 가리키는 언약적 용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을 ‘택자’ 사상과 동일한 의미를 간직합니다(엡1:4-6). 신구약 역사를 막론하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은 자증합니다(롬11:4-6). 아울러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공평과 정의를 행사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때 비로소 참 된 구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을 통해 여호와의 의가 실질로 온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3:5-6, 롬3:21-22). 그리고 이들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렘23:7-8).

이상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전히 다윗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은 자체 속에 처음부터 이중적 성격을 띠고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중적 구조를 띠고 진행됨을 보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 말입니다.

이렇게 렘23-30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기술하던 예레미야는 31장에 이르러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렘31:31-34). 새 언약의 내용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시내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나 괄목할만한 갱신과 발전을 통해 심화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심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고 있음은 시내산 옛 언약에 비해 현격한 계시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을 살펴봅니다.

새 언약의 발효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유효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출6:2-9). 새 언약의 성격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옛 언약(시내산 언약)과 비교해서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에 반응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행동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맺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외적으로는 불연속성을 갖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 언약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지켜질 것입니다. 순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내주와 후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십니다(렘31:34상). 이로 인해 죄로부터 온전히 용서를 받습니다(34절하).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상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에 있어서 종전의 언약과 비교해 괄목할만한 언약의 갱신과 발전을 가져 온 부분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죄용서의 시대’란 사실입니다.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시대 말입니다(히10:17-18). 물론 옛 언약 하에서도 죄용서가 가능했습니다(히9:13).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향한 예표적 제도로서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생했을 뿐입니다(히10:11). 그래서 해마다 거듭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서는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once for all)를 드리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 안에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塗抹) 된 것입니다(히9:12, 10:14, 17-18절).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성취됩니다. 마침내 임마누엘의 종말론적 성취가 실현됩니다. 여기서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적 표현은 언약의 본질로서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계21:3, 창17:8, 출19:5, 레26:12). 성경에 약속된 신적 언약의 핵심사상은 한결 같이 위의 주제를 본질로 삼아 역사 속에서 진행돼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이 찰 때 회복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이 다윗의 위를 좇아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 성취될 것이며(렘23:5-6),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결코 다시 멸망하지 않으며 영속될 것입니다(렘33:14-18).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자연법칙을 담보로 보증하십니다(25-26절). 이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은 필연적이고 영원할 것에 대한 확약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일컫는 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입니다(엡2:14-15).

에스겔의 새 언약 사상

둘째, 에스겔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겔36:26-38, 37:24-28, 11:19-20). 에스겔서에서는 언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에서 언약(베리트)이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전체 예언은 새 언약적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아직은 미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예언의 중심내용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보다 발전, 확대시켜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선지자의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에 모아집니다.

겔36:16절 이하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설정된 미래적 이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실하게 된 요인들이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회고됩니다(16-20절).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상실은 철저히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특별히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 설명됩니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실제로 가나안 족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호8:4-7, 12:11, 13:1-2),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결핍돼 사사로운 종교적 감정만을 부추겨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이기적인 목적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섬긴 사실을 포함하기도 합니다(사1:11-14).

겔36:21-23절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동기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상당히 예레미야적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회복 및 갱신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 중에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심하셨다는 지적입니다. W.J.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언약과 창조, 크리스챤 서적, 1999년)에서, 21-2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신적 언약을 기필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 문제 때문입니다(21절). 신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동시적으로 당신의 실추된 신실하심을 열방 중에서 영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22절). 셋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국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열방에서도 인정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23절).

겔36:24-25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체화될 수 있는 ‘외적’ 세부내용들이 열거됩니다. 곧 열국에서 먼저 취해 내십니다. 그리고 고토로 데리고 가십니다. 정결 의식을 통해 더러운 행동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들을 깨끗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이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합니다. 이는 본질에서 옛사람적 삶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전제조건입니다. 옛 것과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적극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하기 위해 26절 이후부터 본격적인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회복의 ‘내적’ 요소들이 제시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내주케 하십니다(27절). 이로 인해 새 영과 새 마음, 곧 거듭난 새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27절에서는 26절의 새 영을 주신 목적이 설명됩니다. 곧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3-4). 옛 언약 하에서는 이 부분이 결핍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을 가리켜 ‘낡아지게 하신 것’(히8:13)과 ‘개혁할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히9:10)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실체를 위한 모형적 역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에스겔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순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임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화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언약은 신적 기원(起源)상 동일한 목표를 지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 말입니다.

35절에서는 회복된 가나안 고토가 마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회복될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향하는 바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목적 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의 성격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원리에 입각해 아담의 창조언약, 여자의 후손언약,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의 갱신 및 발전적 확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8절에서 새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선언적 말씀 속에서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확인됩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핵심적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사실과 임마누엘의 궁극적 완성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9-38절에 기술된 ‘환경’의 회복기사 내용에 앞서서 26-28절에 소개된 하나님의 신(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남과 영적 회복 및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기사를 소개함은 ‘환경’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당초 에덴의 천상적 환경은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보장받습니다(창3:15, 롬8:19-21). 지금 에스겔의 새 언약의 일차적 강조점이 새 신의 내주와 후원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들의 영적 회복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신’의 내주와 역사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새 영과 새 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에스겔의 새 언약(겔36:26-28)의 내용은 에스겔서 37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특별히 겔37:26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속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이 화평의 언약 또한 내용적으로 아담의 창조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갱신과 확대를 지향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31:31-34)의 내용이 그랬듯이 동일하게 신적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견지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될 새 신(겔36:27)으로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에스겔은 이를 소위 ‘마른 뼈의 소생’ 사건을 통해 설명합니다(겔37:1-14). 이는 ‘마른 뼈’를 통해 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영적 상태를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현재적 영적 상태를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소생 불가능한 절망의 상태를 극명히 기술함에 다름 아닙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단지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진 진흙 덩어리가 생령(生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돼 있을 뿐입니다.

마른 뼈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됩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적 형태’를 갖춥니다.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뼈 조각들이 상합하고 연락해 서로 맞춰집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지막으로 가죽이 덮입니다(겔37:7-8). 완연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습니다. 아직은 죽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즉시 죽은 상태에서 소생합니다. 에스겔은 살아난 사람들을 군대라 칭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해명해 주십니다(10-11절). 남북이 연합된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 말입니다. 이어서 보여주신 두 막대기의 상징적 비유(15-17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고토(가나안)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부연해 약속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체화시켜 천명하십니다(12-14절).

다음으로 겔37:15-28까지의 내용을 통해서는 ‘두 막대기’(15-16절)의 묵시적 비유를 통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정치적으로 통합돼 한 나라를 이룰 것(17절)과, 이들을 가나안 고토로 인도해서 한 왕에 의해 영속적으로 다스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보다 진전된 언약적 계시의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소위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일명 ‘영원한 언약’(26절, 렘32:40)이라 부릅니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겔37:15-28)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 임금이란 다름 아닌 참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곧 복권된 다윗 왕이 신(新) 다윗 왕조인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영속적인 보전(保全)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는 궁극적 구원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궁극적 안식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회복된 에덴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간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역사와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 및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계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다름 아닌 재창조로서 에덴의 회복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3, 2:17, 3:6, 3:15). 이런 식으로 가나안과 에덴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동질성을 함의(含意)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천상의 도성을 동일하게 지향합니다.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고 성소를 저들 가운데 둠으로써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합니다(계21:3). 그리고 이 사건은 성소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됩니다(요2:19-21, 고전3:16, 6:19, 12:13). 따라서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은 예레미아의 ‘새 언약’(렘31:31-34)과 더불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가 보장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과 새 언약은 동일한 목적의 다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최종 목표로 삼아 진행됩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

셋째, 이사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사40-66장). 이사야는 예레미야(BC628-586)와 에스겔(BC595-572)이 포로시대 선지자로 활약한 것에 비해, 포로기전 선지자로서 유다의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740-680년경)에 걸쳐 예언 활동을 한 문서 선지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역사에서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 군사적 격변기로 평가됩니다. 즉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 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키며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스라엘 전(全)역사의 진행구도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 이어 가나안 실지 정복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사사기서에서 구속사 진행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순환적 패턴(구원-타락- 심판-회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유다의 언약파기와 배역의 죄악상과 관련해 원색적인 독설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지적 사역을 시작합니다(사1:24, 28-31). 그러나 본 장(사1장)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淨化)적 차원에서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기에 심판의 예언 중에도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수반됩니다(25-27절).

이사야는 1장에서 먼저 과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재 유다의 패역에 대한 책망을 기록합니다(2-9절). 유다는 그 죄악상의 격심함과 이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이런 비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 소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심으로 아주 멸하시지는 않습니다(9절).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입니다.

앞에서(2-9절) 유다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며 책망하던 이사야는 본 절(10-1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죄악상을 지적합니다. 특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유다의 범죄가 제의(祭儀)적 영역에서부터 비롯됐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당시 유다의 국가적 정체성이 내외적으로 심각히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 여전히 신정왕국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의식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제의에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시적으로나마 대속적 사죄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됩니다. 당시 이런 방식의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될 구속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만을 습관적으로만 반복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가식적인 제사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심리를 발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제사의 본질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사건(BC722)과 남 왕국 유다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는 유다인들에는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때때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적잖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용(御用)선지자들에 의한 왕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적극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혐오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신랄히 정죄하십니다.

이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회개를 촉구합니다(18절). 참으로 언약백성의 특권이란 그들의 죄가 아무리 중(重)할지라도 충심(衷心)으로 드려지는 회개를 통해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기억됨이 없도록 영원히 도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히10:14-18).

이제 이사야는 사39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의 초기부터 유다의 범죄와 타락상을 책망하며 줄곧 심판을 경고해 오던 이사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이 당시 대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사39장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침공과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는 사40-66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의 내용을 예언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새 언약 속에는 비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먼저 사40:1-2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메시지,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곧 다가 올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적 회복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말입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의 내용인즉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2절).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내용을 빌리자면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의 때가 거의 찼다는 것입니다(렘25:11, 29:10). 이제 가나안 고토로의 포로귀환과 이로 인한 회복의 때가 다가온다는 얘기입니다(사14:1, 겔37:21). 이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애굽으로부터의 제 1의 출애굽 사건의 실체로 암시하면서 포로귀환의 구속사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동일한 계시적 관점에서 취급합니다(렘23:5-8).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갖는 새 언약의 계시적 의미가 결국은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공동체와 불가분의 계시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때 두 공동체간 계시의 연속성이란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성의 원리와 관련해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모형과 실체라는 관계성을 갖기 때문이며, 계시의 불연속성이란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반면에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갈3:7, 29, 롬9:6-8).

따라서 이사야의 새 언약은 단순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만이 아닙니다. 사43:19에서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집행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회복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의 경륜을 실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사44:3). 다음으로 허물과 죄를 기억치 않으십니다(사43:25).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40:2, 44:22).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예표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새 언약 안에서 보다 진전되고 확대된 구속사의 경륜이 집행될 것입니다(사48:6-7). 이 뿐만이 아닙니다. 파괴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사44:28) 및 시온의 회복을 약속합니다(사46:13). 이는 다름 아닌 다윗 언약의 회복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 및 시온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곧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고레스 왕(메데-파샤)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사45:1-7). 당시의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판도 속에서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 부은 종으로 삼아 새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여기서 고레스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명해 부르심은 그만큼 새 언약의 집행이 확실하며 사실적임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역사의 주관자가 천지상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극명하게 현시하시는 대목입니다(5-7절). 이 예언적 약속의 말씀은 에스라1:1-4을 통해 성취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진전됩니다.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통치적 왕권을 가져올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합니다(사52:7). 그는 처녀에게서 잉태될 것입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컫습니다(사7:14). 그의 본체와 속성은 하나님과 동일시 여김을 받습니다(사9:6). 그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며 친히 참 다윗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될 것입니다(사9:7, 32:1, 55:3). 더하여 다윗 왕으로 오실 구원자는 이새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사11:1-2). 이런 사실은 야곱이 임종에 즈음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예언적 축복을 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선언한 복의 내용 속에서 이미 확인됩니다(창49:10). 이런 식으로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메시아의 가문으로 택정을 입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성취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왕적 통치하에서 모든 피조물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납니다. 허무한 데 더 이상 굴복치 않습니다(롬8:19-23). 본래의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마치 회복된 에덴처럼 말입니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와 새 창조의 시대가 도래하는 셈입니다(사11:6-9). 그러나 이런 새 시대는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해 본격적으로 출현한 교회시대를 거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고 선언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그 진정한 실상(實像)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성격도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보다 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초림의 사역 및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재림의 사역까지를 포괄적으로 망라해서 전망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지상적 생애가 이렇게 오묘하신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호리만큼의 차착(差錯)도 없이 시종일관하게 섭리적으로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가장 큰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의 도래는 왕적 메시아의 신분(사52:13, 15)으로 확인되기 이전에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이사야의 새 언약이 간직한 구속사적 특징입니다(사52:14, 53:1-12). 동일한 메시아에 대한 이중적 예언 말입니다(사52:13, 15절과 14절의 비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먼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기에 마치 겹쳐진 두 산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서 하나의 산인 양 착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각축장(角逐場)을 방불케 하는 가나안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자연히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봅니다.

구원자로서 종의 승귀(exaltation)와 함께 고난 받는 종의 처참한 비하(卑下, humiliation)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먼저 예고합니다(사52:13-15). 사53장에서는 종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끝내 싫어 버림을 받게 됩니다(1-3절). 그 종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찔림을 받습니다. 그는 심하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8-9절).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오직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애매히 당한 고난입니다. 헌신적인 희생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대속적으로 짐지게 하심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사53:4-6).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부활과 하늘 보좌로의 승귀가 보장된 대속적 죽음이었기에 말입니다(히12:2, 롬8:34).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종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며, 만인의 무릎을 그 분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사53:10-12, 52:13, 15, 빌2:9-11).

나아가 사61:1-3의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메시아 사역의 구속사적 성격을 이스라엘의 희년 절기(레25:10-11)의 종말론적 성취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의 성격이 사61:1-3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하심으로 구약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고난의 종 된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암시적으로 증거하십니다(눅4: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새 언약의 내용들을 특별히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들이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다윗왕조의 복권이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왕조의 복권은 미래에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현한 새 이스라엘로서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자연히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다윗언약을 총체적으로 포괄(包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을 통해 성취의 실상을 드러내게 됩니다(눅22:19-20), 히브리서 기자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 진술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히10:12-18).

⑪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 사상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첫째,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족보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移住)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주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임마누엘의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의 생명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相應)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암시적으로 증거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험(先驗)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마2:23).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합니다(마3:1). 4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합니다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입니다. (막1:1-8, 눅3:1-17, 요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와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하는 선구자로서의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마태는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사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3: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인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마3:1절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마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탄생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눅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침례) 받으심입니다. 마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금까지 은거(隱居)해 계시던 참 다윗 왕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되었고 그의 왕적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합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증하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마3:15절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에서 되어진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요구를 성취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요한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고후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 책(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를 죄인들과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하고자 대신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빌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14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식은 단순한 성례전적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 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4:17부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됩니다.

셋째, 하늘의 재가(裁可)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4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입니다. 특별히 요1:31-34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번 공인된 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행사로 들어갑니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에 충만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적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적 능력들과 복음적 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마12:28, 눅4:18, 행10:36-38). 셋째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행2:38).

넷째,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마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동일한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마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 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마4:1, 막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요일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합니다(마4:1). 여기서 ‘그 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2)다음으로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창2:16-17). 본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 속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롬5:14, 고전15:45, 막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행4:12, 히4:14-16, 벧전2:22, 고후5:21).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본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7:38)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13:1-2, 25-26)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주시고는 다시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창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 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일관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해서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계시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적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비하한 반면(민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민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자세는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와지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민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적 심판의 일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신1:3).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입니다(신8:3, 16, 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적 출애굽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안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모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세 번에 걸친 시험(마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마치십니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과의 관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명실공히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입니다. 렘31:34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 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입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의 당초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공히 약속하고 있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재차 확약하십니다(렘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얘깁니다(계21:3, 엡2:14-16).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됐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영과 새 마음의 변화 곧 전인적인 거듭남에서 찾습니다(겔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을 시도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한 성전재건도 시도됐습니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여전히 일삼았을 뿐입니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기록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곧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약교회공동체의 출현 말입니다(마16:16-21).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는 어떤 방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예식을 잡수시는 것으로 이를 폐하시고, 새롭게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가운데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하시는 내용을 기술합니다(눅22:14-20). 본문에서 유월절 예식은 분명히 성찬식으로 대체됩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예표적 본의가 성찬식의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모형과 예표로서 유월절 예식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표가 실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죄(赦罪)와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됩니다(엡2:8-9, 1:7, 롬3:22-24, 8: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양자), 그리고 후사 등으로 부릅니다. 이들을 집합적으로 부르게 될 경우 바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한 새 사람 곧 천상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 말입니다(엡2:14-15, 1:23, 4:12, 골1:18).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출현은 성찬식에 암시 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천상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마16:16-21)

상황이 이럴진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사역의 결과로 출현하게 된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 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이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춰진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도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逐邪)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에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명백한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후에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미 도래한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차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실천적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수혜자(受惠者)로 하여금 시혜자(施惠者)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마련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약2:22, 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때론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증거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질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의 정체성을 가시(可視)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 및 대립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적으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그렇습니다.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언급 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구원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능력 있게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확인 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종착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상적 나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기자들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빌3:20)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골1:13)들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의존적인 관계상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천상의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3.마치면서

이제 본 강론을 맺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서 자체 속에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증하는 통전(通全)적 주제이기도합니다.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의 편집구도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사상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상을 주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려고 할 때, 언약적 구속사란 관점은 성경의 본의를 밝히는 최선의 해석의 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해석적 관점이며 구조적인 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해석상의 객관적 증거를 특별히 창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언약(문화명령)-선악과 언약(아담언약)-여자의 후손언약(원시복음) 속에서 발견되는 신적 언약간의 상호 불가피한 의존적인 관계성과 연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상의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마6:33)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구속의 원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신적 언약의 총화요 제반 언약의 결국인 새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른신앙/바른교회/바른목회를 지향하는 일과 관련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이란 주제 안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총제적인 계시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데서 비로소 그 가능성과 실현성이 일차적으로 보장된다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본 강론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What the Bible Says)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적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10:2-3).

출처: 주님의 뜰 - 행원소구/김유미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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