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0) 애굽 안에, 관 안에
이응한 목사 2017. 4. 25. 21:58(창 50) 애굽 안에, 관 안에
창세기 강해에 거의 2년 걸린 것 같습니다. 창세기가 50장까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 주에 한 장씩 해도 1년, 두 주에 한 장씩 진행해도 2년이 걸립니다. 창세기 강해를 첫 장부터 끝장까지 마친다고 무슨 특별한 일이 되겠습니까마는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신앙의 가장 근본과 기초에 관한 책이라 할 것이며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떠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 속에서 그 타락하여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을 다시 부르시고, 부르심 받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고,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져가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우리말(한자어)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은 Genesis, 곧 내력과 족보의 이야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50장에 이르러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탄생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마칩니다. 영어성경은 “In the beginning"에서 시작하여 ”in a coffin in Egypt", 즉 “시작 안에서”로 시작하여 “애굽 안, 관 안에서”로 끝납니다. 히브리어로는 “브 레싯”으로 시작하여 “브 에돈, 브 미스라임”으로 끝납니다. 시작 안에서 탄생하여 관 안에 눕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나고 걷다가 죽어 관 안에 드러눕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모든 인생들이 일평생 걷기만 하다가 죽어서 관 안에 눕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허망이요 허무요 비극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만드시고 그런 인간들이 일평생 걷다가 죽어 묻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능력한 하나님 노릇을 하신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요 희극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끝나는 존재로 내버려 두지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찾아오시고 부르사 소망으로 생명의 길을 향하여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과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온 야곱은 이제 숨을 거두며 조상이 누운 곳,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힌 가나안 땅 막벨라굴에 자신을 눕혀달라고 명합니다. 또한 요셉은 훗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실 때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메어가라고 명합니다. 그 명령대로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의 해골을 메고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 세겜에 그를 장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눈을 감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 앞에서 걸어가게 하신 그들이 땅 속에서, 관 속에서 영원히 썩어 없어지게 하지 않으실 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새 생명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언젠가 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때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을 믿고 눈을 감고 그 땅 속에 그 관 안에 평안히 누운 것입니다.
창세기는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 즉 성도가 어떻게 죽을 것을 말씀하는 성경입니다. 성도가 무엇을 믿고 무엇 안에 눈을 감고 누울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짧은 인생, 죽음을 두려워 일생을 종노릇하며 실낱같은 목숨을 붙잡고 바둥거리다 가는 자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공포와 멸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영원을 바라보는 자에게 죽음은 안식이요 영원에 잇닿은 통로요 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애굽 안에, 관 안에” 영원을 꿈꾸며 누운 것입니다.
야곱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이 누운 막벨라 굴에 눕고 야곱이 애굽에서 관 안에 누웠듯이
성도는 “믿음 안에, 주 안에” 소망을 안고 눕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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