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고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나요?


[질문]


어떤 목사님 설교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전 3:16절)

그런데 그 목사님은 행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이 말씀과 또 몇 군데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고 합니다. 성령 받아야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올바른 말씀이신지요?


[답변]

구원을 받았어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주제에 대해선 오래 전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솔직히 성경적으로 따져볼만한 것은 다 따졌기에 따로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탐색해 보면 따로 받아야 한다와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양쪽의 입장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의 논거가 성경의 부분적 기술에만 치중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일관되게 드러난 구원과 성령의 전체 맥락에서 따져보는 면이 부족한 반면에 몇몇 구절에 치중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만 해석하려 듭니다.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강화 변증할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말씀만 동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령의 외적 은사, 그 중에서도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려다 그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극단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게 방언을 설명하거나 방언을 받은 모습에 관한 구절들만 내세워 변증 도구로 사용합니다. 방언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외적 은사 중의 하나일 뿐인데도 성령에 관한 근본원리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구원 후에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 주제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구원과 성령에 대해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원리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껏 간과했던 측면도 일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구원 받지 못한다.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성령 받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신앙 논쟁을 해결하는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7-13)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합니다. 특별히 죄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을 심판했고 또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계획이 완성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독생자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데, 그 은혜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성령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를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질문자님 말씀대로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처럼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믿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요컨대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은 예수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케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성령이 언제 내주하는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아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나게만 해놓고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 받게 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또 신앙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성령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성령이 있을 수는 절대 없습니다. 결국 한 성령이 처음에는 구원만 준 후에 떠났다가 뜨거운 신앙을 주기 위해 다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깊이 따져 볼 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특정인에게 특정시점에만 제한적으로  역사한다는 뜻과 같아집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말하는 바와 완전히 상충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성령이 영원토록 너희와 거한다고 했습니다. 수시로 들락날락하지 않고 내주(內住-indwelling)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곁에서 위로하는 자(comforter)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바로 곁에서, 즉 항상 함께 하셔서 환난 가운데 위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영생에 대한 소망을 키우게 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보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는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이 내주할 것이라는 이 약속 전후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신자더러 당신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12-14절) 그리고선 성령이 와서 신자에게 내주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 성령 내주의 목적은 당신 이름으로 구하게 해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령이 오면 세상은 예수를 보지 못하나 성령 받은 자는 보고 또 예수님이 살았듯이 신자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신자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신자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9-20절) 말하자면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자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당연히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당신을 사랑하는 자이며 당신도 그를 사랑해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21절)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의 위로 받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이 대체 언제 내주해야만 합니까? 두말 할 것 없이 구원 받자마자 아닙니까? 구원 받음과 성령 내주 사이에 시차가 있다면 그 동안에는 이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성령이 중간에 떠날 수 있거나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주장도 똑 같은 하자를 내포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될뿐더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자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그분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열두 제자와 달리 주님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로선 주님이 당신의 원수였던 자기마저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았지만 그 이유와 자신에 대한 그분의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몰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이후로 바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전의 자기 같은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7-22)

분명히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비록 제자들과 며칠 교제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보고 또 제자들도 나서서 그분의 가르침과 십자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내주하여 그로 진정과 열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하지 않았다면 며칠 새에 열렬한 전도자로 곧바로 변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구원과 성령 내주의 시점 사이에 간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체험에 입각하여 고린도 교인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힐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분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삼위 하나님을 성경대로 올바르게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시공간상으로 너무나 떨어져 있는 신약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천주교처럼 사도의 해석에만 의존토록 하나님이 방치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에게는 곧바로 성령이 내주케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그분의 일을 해야 하고 또 때로는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면 당연히 구원과 동시에 성령이 내주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도 문제는 구원 받은 자도 성령을 따로 받는 것 같고, 특별히 제자들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두 번이나 받았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 논란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을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따져 보기로 합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각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했으니 제자들은 이 때 성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기 직전에 다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데 홀연히 아주 강력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임하며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언뜻 보면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하여 함께 동행 했기에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성령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또 심지어 성령을 받았음에도 다시 방언의 은사를 주는 성령을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정하고 선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행13:48) 믿었습니다. 바울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엡1:4,5)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신자나 바울에게 예정되었던 구원은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비로소 유효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해 삼년간 동행하고 있을 때는 구원이 예정 된 것이지 아직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구원을 받았다가 취소가 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에 이미 몸을 씻은 자는 다시 씻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발만 씻겨 주시면서 이중에 하나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유다는 제자로 선택하긴 했지만 구원으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도대체 자기 같은 자가 무슨 수로 애굽에 종살이 하는 동족을 구원해 낼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하나님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논리적으로 따지면 네가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마지막으로는 애굽의 장자가 죽고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고 답해야 맞습니다. 그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당신의 증거, 즉 답이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치고 시내 산에 도달해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약속만큼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출애굽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고 완전히 구원 받은 후 이 산에서 어떻게 제사지낼지나 염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자로 세웠으면 출애굽은 이미 이뤄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시기와 방법뿐입니다. 그분에게만은 인간과 달리 약속이 바로 보증 자체이며 따로 징표가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한 제자를 택했으면 구원은 이미 이뤄진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아직 유다가 남아 있었듯이 구원의 실현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쉬는 숨, 즉 성령을 받고는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정되었던 구원이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감당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백이십 명 모두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죽으려 결심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반드시 실현 될 그분의 또 다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성령 받은 것은 작정 되었던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증거이자, 또 앞으로 자기들을 통해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그분의 소명에 대한 보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구원 받은 후에 성령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구원이 성령을 받아 확정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님 말씀대로 진리의 영이 와야만 당신을 믿게 되고 당신 계명대로 살며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영생하게 된다는 약속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보증으로 구원 때에 성령을 받으며 그 이후로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럼 왜 예수님이 이미 부어주신 성령 위에 다시 “성령이 임하면”이라고 말했습니까? 이 문제는 초대 교회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니고데모나 빌립보 간수처럼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선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동족의 구원이 안타깝게 여겨졌고 절실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한 것처럼 질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엉뚱한 말씀으로 대체했습니다. 우선 때는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어김없이 실현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은 염려하지 말고 너희더러 지키라고 한 계명부터 철저히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기독교가 태동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했습니다.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지막 계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전에 그 일을 직접 하시지 않고 죽으신 이후 제자들에게 위탁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십자가에 죽기 위한 것이므로 공사역 중에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당신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초자연적 능력을 더 크게 베푼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하는 일을 당신보다 더 많이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신께서 생전에 가르쳤던 제자보다 베드로가 오순절 한 번 설교에 회심시킨 3천명이 수십 배나 많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순절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를, 가시적 조직체 이전에 성도들이 함께 힘을 합해 복음을 전할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창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하나로 되게 하여 전도 사역을 담대하게 담당할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어도 개인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인식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접했고 그분을 위해 여생을 살겠다는 다짐은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 대해선 전혀 무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성령의 강력한 임재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담대해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되었지만 사역자로선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전에 성령을 받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주위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나 참고할 신약 성경이 있었던 오늘 날의 신자와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강력한 외적 은사를 최초로 체험했어야 했고 또 성령이 어떻게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과 역사를 성경기록으로 남겨 후대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 오순절 날 천하 각국에서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 당신의 큰 능력을 보이기로 했습니다. 아니 능력보다는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제자들로 각 나라 언어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지는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줘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임을 더욱 확증 시켰던 것입니다.

요컨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각자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성도들 위에 즉, 교회라는 공동체 위에  가시적 모습으로 임재한 것으로 역사상 한 번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한 교회 위에 성령이 강력히 임재하여 모든 성도가 방언을 하고 또 그 모두가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게 된 예는 전무후무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으로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가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았는가?

구원 얻었는데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 믿은 신자에게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성령이 일시적으로 내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닫지도 못하며 기도나 묵상이나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세상 쾌락과 죄악과 사단의 유혹 및 방해를 제대로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그렇게 방치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는 예수 믿기 전에 어둠 속에 있었던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구원이 살아 있을 때부터 확신을 갖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약속대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 없이 어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보혜사가 함께 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구원 받아도 성령을, 특별히 방언 같은 은사를 따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는 바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을 통역함 등의 은사는 신자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한 성령이 하시는 일로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나눠주십니다. 대개의 신자들이 이 중에 하나 정도의 은사는 받습니다. 물론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신자도 많지만 구원 받지 못했거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2:29-13:2,13)

성경은 분명 외적 은사 외에 크고 더 좋은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며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것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한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가장 좋은 은사를 소유한 했다는 뜻입니다.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받는 것이 신자에게 더 유익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구원 받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바꿔 말해 흔히 행해지는 설교나 논쟁에서 핵심 주제와 사용된 용어들의 뜻이 애매한, 심지어 당사자마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로든 목사님의 설교에도 그런 모호함이, 그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나 순수함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님, 여실히 나타납니다.

우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마치 “공부를 못하는 자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교인들이 이런 너무나 ABC 같은 말씀을 듣고도 아멘만 연발합니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라 해도 말씀을 깊이 갈등 묵상하는 일에서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신에 그분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신앙이 미지근한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지 않으면 신앙이 미지근해진다”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신앙이 더 뜨거워지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해야지 성령을 다시 받으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차라리 아예 “성령 받지 않고도 구원은 일어난다.”라고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 말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더러 당혹하지 않고 쉽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과 구원에 관해 용어를 통일되게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 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행1:5의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말은 항상 한자의 의미와 중첩되고 교회 관행과도 연결되어 해석되므로 성령 세례라고 하면 성령이 인간에게 회개를 하게 만드는 최초의 강림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는 완전히 물에 잠기게 만든다는 ‘뱁티조마’, 우리말로 세례 혹은 침례라고 번역된 모든 말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성령세례는 오히려 성령의 더 강력한 임재,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구원이 실현되는 것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또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 성령으로 중생할 때에는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성령이 ‘임재’(강림하여 내재한다는 의미로)한다는 표현이 나을 듯합니다.(이는 순전히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성령의 임재와 관련해선 반드시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에 대해 구분해서 설교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유익하다든지, 소원하여 기도하면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 은사를 받지 않았기에 구원 받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구원 유효성이나 신앙 우월성의 증명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이제는 성경 말씀이 있으니 그런 은사가 실효되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극단도 성경의 진술과는 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으로 구원이 유효해졌다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고 내주하고 있으므로 따로 성령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신자라면 더 뜨거운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의 더 강력한 역사는 당연히 소원해야 합니다.

10/13/2008

출처: 박신 목사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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