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없다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7. 5. 30. 06:06
대안은 없다
내가 태어난 모국에서보다 더 오래 살았던 곳, 그래서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하와이는 사면이 바다인 탓에 싱그러운 해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여름, 바깥 기온이 상승하고 내리쬐는 강한 햇볕으로 땀을 줄줄 흘리다가도 일단 손바닥만 하게 작은 공간일지라도 그늘진 곳에나 혹은 집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너무 시원하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금세 싹 가셔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우리는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지냈으며 바다에서부터 산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바람, 그 시원함 때문에 1년 12달 에어 컨디션을 켜본 적 없이 30여 년간을 잘 지냈다. 물론 그런데도 여전히 에어 컨디션을 켜고 사시는 분도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자연 바람이 더 좋았기 때문에 그랬다.
더운 지역에서 더운지 모르고 지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원한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는 우거져 푸르건만 나무들마저 찜통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모두 졸고 있는 듯, 한여름 햇살은 쨍쨍 내리쬐는데 바람마저 없으니 숨이 턱에 닿고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다행히 집집이 센트럴 에어 컨디션이 있어서 바람을 대신하긴 하는데, 나는 에어 컨디션 바람이 지금도 별로다.
시원한 자연 바람이 없는 대신, 에어 컨디션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여름을 견디는 사람들, 이런 것을 대안에 만족하는 삶이라고 해야 하겠지. 어찌 생각해 보면 세상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대안이 있는 한 사람이 살아갈 수 있고 문제가 있을 때 대안을 찾는 것은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각종 분야의 모든 것에 대안을 찾느라 고심하는 과학자들, 공학자들, 그리고 많은 분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기 때문에 삶의 질이 조금은 더 향상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대안은 어디까지나 대안일 뿐, 그 대안이란 것이 본질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부자들의 착취 아래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제 아래 혁명을 일으켰던 스탈린과 그 추종세력들, 그 결과는 참혹하다.
기독교 역시 대안은 없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다.나를 따르라.” 하고 소리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다. 그러하기에 모든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운행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기 때문에 왕 세우기를 좋아하고 왕의 자리에 앉았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왔음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분의 주권을 회복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할 이스라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는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의 노예생활에서 모세의 지도로 극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 앞을 가로막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광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신을 더 원하였다.
모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간 후, 속히 내려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다.’하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아론을 무섭게 채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신을 경배하기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백성의 마음을 알고 있던 아론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때 아론이 만든 그 금송아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라 불렀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의 절기에 금송아지에게 바친 것이다.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출 32: 4).”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그 대안으로 보이는 우상을 만든 것이다! 손으로 만든 우상과 하나님이 주신 언약적 제사제도와 혼합시킨 것, 이것이 혼합종교의 첫 탄생이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시요, 인격적인 신이며, 생명의 신이시다. 인간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잡신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는 헛된 행동일 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시하신 그대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받지 않으신다. 내가 만든 우상을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하여서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구원으로 통하는 길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오직 그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예수님 한 분만 구원이심을 믿어야 산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만(Only Christ)란 말을 싫어한다. 세상의 모든 神들을 통해서도 구원의 길이 있고 종국에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유행처럼 번져가는 WCC 혼합종교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계 유명한 목사님들도 모두 그 대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주를 섬기는 올바른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에 대안은 없다!
생명의 길에서마저도 대안을 추구하고 인간의 어그러진 길, 넓은 길로 가다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뵙게 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여기서 우리는 ‘불법’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불법은 세상의 모든 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상 법보다 더 중요한 법은 하나님의 언약 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법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섬기며, 예수님의 길에서 살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을 따르다가 주 앞에 서는 그 날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란 칭찬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만 사랑하는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only savior)구원자 시다.’이것이 구원의 속성이요,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자이다.” 라고 하는 말은 틀렸다. 개인 신앙생활이건, 단체 신앙생활이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안은 없다. 본질(essence)로 돌아가고 본질에 충실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 6-7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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