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순종의 상관관계
묵상의 글 2017. 5. 13. 11:26믿음과 순종의 상관관계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이 있다면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삶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가고 분리될 수 없음에도 그들이 그 둘을 분리시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까닭이 뭘까, 잠시 헤아려 보았습니다.
믿는다면서 삶은 전혀 믿는 자 같지 않은, 요즈음 소위 “개독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는 바울의 선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든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사도는 지금 첫째,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고 둘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지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아,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구나, 그러니 믿음은 좋은 것이고 행위는 안 좋은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한 게 아닐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어느새 ‘믿음’을 ‘믿어서’라는 행위로 대치시키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받았다, 그러니 너도 ‘믿고’ 구원받아라” 아마 바울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지, 바울은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확실히 밝혔는데도 말이지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또 다른 이유는 “행위는 자기 의를 조장한다”는 가르침에 대한 지나친 몸사림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말씀대로 살려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그런다는 말을 들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런 속말을 들었거나 하여 행함에 주저함이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믿음대로 살자니 귀찮기도 하고 불편한 것도 많고 손해보는 것도 많기에, 다시 말해, 내 욕심, 내 마음, 내 감정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듯합니다.
믿음의 순종
이렇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을 유발시킵니다.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니까 그 둘을 분리시켜 별개의 상호독립적인 관계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둘은 상호유기적인 불가분의 관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순종이 믿음에 의존하는 그러면서도 순종이 더 큰 믿음을 만드는 역동적 선순환의 정비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순종도 자라고, 순종이 자라면 믿음도 자라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순종’이라는 것이 보다 좋은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온 믿음에 근거한 순종(행동, 행위). 역으로, 순종으로 드러나고 증명된 믿음. 그래서 야고보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약 2:18)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일관되게 순종 곧 행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고 시작되는 곳부터입니다. 너희는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한 군데만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이지요. 듣고 본 것은요? 그 믿음따라 사는 바울의 삶의 내용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믿음을 사는지 너희가 듣고 보지 않았느냐, 너희도 그렇게 그 믿음을 살아내어라,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친절하게도,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랍니다. 왜 이 말을 덧붙였을까요? 믿음을 따라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들에게 닥칠 어려움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세상 평화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그래서 언제 깨어질까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것인데 반해, 하나님의 평화 곧 샬롬은 아무런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니 아무런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너희의 믿는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말씀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자란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내용의 양과 질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견고함입니다. 전자는 말씀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자랍니다. 그러나 믿음이 견실하게 자라는 것은 오직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 봄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종했더니, 그렇게 살아 보니까, 과연 말씀대로 되더라는 확인이 말씀에 대한 신뢰를 더 하게 되고 또 다른 순종을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 체험으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순종에 응답하십니다. 순종했는데 모른 체 계시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쌩까지 않으십니다. 순종에 대한 즉각적인 인정이 주어집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러한 인정만으로도 순종의 충분한 보상이거늘 이외에도 이런 저런 부상을 덤으로 얻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점점 자라고,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자주 더 큰 순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바쳐 충성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칭찬 하니까, 제 어릴 때 기억 하나가 스치는군요. 아마 네다섯 살 때였을 겁니다. 형과 누나와 함께 밖에서 놀고 있었는데 둘 중 누군가가 제게 집에 가서 무언가를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대답이 왠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 착하다 하면 갔다 올게.” 물론 형인지 누나였는지가, “그래, 우리 유상이 착하다”고 말해 주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심부름을 해 주었지요. 지금 생각난 건데, 엄마가 제게 무얼 시키실 때 늘 “우리 유상이 착하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저는 칭찬에 무척 약합니다.)
말씀만으로는 믿음은 견고해지지 않음은 자주 인용되는 마태복음서 7장 24절부터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로 뒷받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자의 믿음은 견고하여 심한 비바람을 견디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즉 말씀을 듣기만 한 자의 믿음은 사상누각처럼 허약하여 강한 비바람의 시험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만으로는 이웃을 위해 대단한 희생도 할 수 있고 더우기 주님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웃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라도 더 가질까 온갖 궁리에 힘과 시간을 쏟습니다. 혹시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여 예수 믿음을 감추기도 하고, 대충 믿는 척하기도 하며, 세상사람들이 황당해하고 놀리는 성경의 특정 부분들과 나아가 복음을 부끄러워 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읽을 땐, 설교를 들을 땐 순교자의 심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행함을 강조하시는 것이 명백함에도 이 비유를 가르칠 때 혹여 행위구원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게 되지나 않나 몸을 사리는 교사들이 많은데, 그래서 심지어 박영선 목사조차, 이것은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초점이 있는 비유라고 다소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집을 지은 행위는 두 사람에게 다 있었다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차이는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을 듣고 지었고 또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혹은 자신의 생각대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더군요.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고 지금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그리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한 해석은 행위구원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억지 해석이지, 바른 해석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주님과 함께 무려 삼년 반의 시간을 함께 숙식하며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의 믿음이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무너져내린 것을 압니다. 베드로를 필두로 한 열두 제자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 마지막까지 큰소리쳤으나 주님의 처형장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꼈던 요한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누가 더 크냐, 다윗왕국이 회복되면 누가 무슨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였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복음서를 쓴 제자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 제자답게 살기 시작한 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뵈온 지도 몇 달이나 지난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께서 능력을 입혀 주신 후부터입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내 것 네 것 없이 필요에 따라 쓸 것을 나누는 등, 지금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살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이 쌓여 비로소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리스챤이라는 별칭을 얻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데까지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결코 말씀만으로 그들의 믿음이 자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 주심
믿음과 순종이 정비례 관계에 있다 하여, 반드시 1대1의 관계라고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비례의 폭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린 믿음은 연약하여 순종을 일으킬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믿음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행위가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로 믿음의 순종을 가능케 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만큼,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우리는 주눅이 들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아무리 해도 제대로 잘 하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요. (제 형은 저와는 달리 제대로 못하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신임을 듬뿍 받았는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제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전 늘상 꾸지람과 눈총을 받고 살았는데, 그래서 제가 아주 자신있는 것이 아니면 잘 하려 들지 않습니다. 괜히 손댔다가 꾸지람과 핀잔만 들을 것이 두려워서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번에 잘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시간이 많으시고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시고 잘못해도 노하시거나 꾸중하지 않으십니다. 핀잔도 비아냥도 하시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다독이시고 격려하시고 조그만 성공에도 대단히 칭찬하시는 ‘자식바보’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 바울인지라 앞서 빌립보서에서 “행하라”고 했을 때 그가 사용한 단어는 ‘프라쎄떼’ 영어로 ‘프랙티스(practice)’ 우리말로 ‘연습하라 혹은 익히라’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것에 익숙할 때까지, 될 때까지 해보고 또 해보라는 말이지 지금 당장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라는 주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틀려도 잘못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런 실수와 잘못은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염려와 두려움없이우리는 될 때까지 우리가 믿는 바를 살아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꾸중은 않으시나 칭찬은 작은 것에도 엄청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난 믿음이 작어서라며 주저하신다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16절에서 말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를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만큼, 아는 만큼, 믿는 만큼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심지 굳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뿐입니다. (마 25:24-26)
하나님의 마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실제로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순종케 하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도 순종의 마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그 조차도 하나님께는 중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가 할 일은 실상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건 제가 글을 쓰기 전에, 아니 글을 쓰면서 조금 전까지도 전혀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결론인데, ) 그런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닐지요? 내가 네 안에 그런 믿음과 그런 마음을 심어 놓았다. 왜인지 아느냐? 내가 널 사랑해서란다. 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가 네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잘 다니다가 머리 큰 다음부턴 이런저런 세상의 유혹에 빠져 성당에도 다니지 않더니, 급기야는 성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결론짓고,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 자신이 신인양 교만을 떨며, 온갖 추악한 음란하고 문란한 생활을 할 때에도, 너를 불쌍히 여겨 네게 복음을 전하라 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흔드려 하고 나를 모욕하고 욕보였을 때에도, 그리고 너가 마침내 정신을 차려 나와 함께 지내온 지금까지의 지난 시간 동안에도 널 한 시도 놓지 않고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전 이 답을 옮기며 하나님의 사랑에 북받쳐 눈물이 왈칵 솟구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내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았노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 아닐지요? 즉, 하나님에 대한 내 애정고백이 아닐지요? 그렇게 볼 때, 순종은,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제게도 하나님에게도.
201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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