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이응한 목사 2017. 7. 2. 02:26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보니엠’이라는 흑인 보컬그룹이 있었습니다. 70년대 후반이니까 40여년 거의 된 것 같은데 지금도 기억나는 히트곡은 ‘바벨론 강가(By the River of Babylon)'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냥 특색 있는 팝송으로만 생각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바벨론 강가 거기에 우리 앉아, 아아, 우리는 슬피 울었네, 우리가 시온을 기억할 때.....”, 바로 시편 137편 앞부분이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에는 시편 137편처럼 “에돔 자손을 치소서, 멸망할 바벨론아,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는 바벨론과 에돔을 향한 원망과 복수와 저주의 소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137편을 생각하면서 다시 들으니 단조롭고 경쾌하게 흐르는 음률과 흑인 특유의 음색 가운데 예루살렘을 훼파당하고 수천 리 머나먼 바벨론에 끌려와 원수들에게 종살이하며 그들을 위하여 비파와 수금을 타며 노래할 것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내가 어찌 원수들을 즐겁게 하려고 주의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차라리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어다,‘ 강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시온성을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곡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한 때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했던 이스라엘은 타락하고 분열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셨지만, 한 때는 히스가야와 요시아를 통하여 신앙의 회복이 잠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끝내 멸망의 길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흩어버렸고 바벨론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쳐 죽이고 그 눈을 뽑고 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게 하였고 귀인들은 죽여 버리고 빈천한 자들만 포도원 농사를 위하여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모조리 파괴하고 성전의 모든 금, 은, 놋을 모두 뜯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의 숫자는 겨우 4,600 명에 불과했다고 예레미야 5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고 요단강 동편에 살던 에돔 족속이 슬금슬금 들어와 유대땅을 차지하고(이 족속에게서 나중 헤롯왕이 나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 일부는 애굽으로 내려가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나중 이들에 의하여 헬라어성경 칠십인역이 번역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도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의 처참한 파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예레미야서도 그 말미에 그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애가(哀歌)란 애통하는 노래란 뜻입니다, 1장의 1절부터 22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머리글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아름답고 영화롭던 예루살렘이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임당하고, 잡혀가고, 유린당하고, 손을 벌려도 도와주는 이 없고, 목 놓아 울어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이 없고, 보물을 먹을 것으로 바꾸고도 굶주리는 비참한 기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없고 도움도 없는 처참한 상황을 애통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백성들이 패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통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관계가 없다니요?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과 멸망과 고통 가운데 우리 인간 모두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패역한 인간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멸망길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오랜 침묵과 어두움을 거쳐 하나님은 끝끝내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한 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 로마 가톨릭의 암흑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한 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의 불길과 선교의 횃불이 타오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선교의 불길이 한국과 아시아로 옮겨가기도 했고 다시 아프리카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인류역사 전체,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우상을 따라 멸망길로 달려가던 이스라엘과 유다와 오늘날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요?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시대의 패역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어째서 그렇게도 닮아 있으며 그렇게도 변함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인간들은 그러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다음에야 비로소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고 통곡하게 되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심판의 그 날에는 울어도 소용없을 텐데....
.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한 때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했던 이스라엘은 타락하고 분열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셨지만, 한 때는 히스가야와 요시아를 통하여 신앙의 회복이 잠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끝내 멸망의 길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흩어버렸고 바벨론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쳐 죽이고 그 눈을 뽑고 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게 하였고 귀인들은 죽여 버리고 빈천한 자들만 포도원 농사를 위하여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모조리 파괴하고 성전의 모든 금, 은, 놋을 모두 뜯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의 숫자는 겨우 4,600 명에 불과했다고 예레미야 5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고 요단강 동편에 살던 에돔 족속이 슬금슬금 들어와 유대땅을 차지하고(이 족속에게서 나중 헤롯왕이 나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 일부는 애굽으로 내려가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나중 이들에 의하여 헬라어성경 칠십인역이 번역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도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의 처참한 파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예레미야서도 그 말미에 그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애가(哀歌)란 애통하는 노래란 뜻입니다, 1장의 1절부터 22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머리글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아름답고 영화롭던 예루살렘이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임당하고, 잡혀가고, 유린당하고, 손을 벌려도 도와주는 이 없고, 목 놓아 울어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이 없고, 보물을 먹을 것으로 바꾸고도 굶주리는 비참한 기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없고 도움도 없는 처참한 상황을 애통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백성들이 패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통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관계가 없다니요?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과 멸망과 고통 가운데 우리 인간 모두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패역한 인간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멸망길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오랜 침묵과 어두움을 거쳐 하나님은 끝끝내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한 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 로마 가톨릭의 암흑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한 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의 불길과 선교의 횃불이 타오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선교의 불길이 한국과 아시아로 옮겨가기도 했고 다시 아프리카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인류역사 전체,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우상을 따라 멸망길로 달려가던 이스라엘과 유다와 오늘날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요?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시대의 패역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어째서 그렇게도 닮아 있으며 그렇게도 변함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인간들은 그러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다음에야 비로소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고 통곡하게 되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심판의 그 날에는 울어도 소용없을 텐데....
.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 (0) | 2017.11.20 |
---|---|
예레미야 애가 3장 (1) | 2017.07.14 |
포도주와 떡의 약조 (0) | 2017.06.17 |
아무리 작은 아이성일지라도 (0) | 2017.06.06 |
단 한 점의 오물도 허용할 수 없다! (0) | 2017.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