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은 숙명론인가?

예정론 2017. 7. 8.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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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19: 제15장 예정론은 숙명론인가?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숙명론을 혼동하는데서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미래의 사건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하는 것 외에는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양자는 운명론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정론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숙명론은 물리적 필연성과 구별 지을 수 없는 마치 큰 강이 나무 조각을 떠내려 보내듯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맹목적이며 무지한 그리고 비인격적이며 무도덕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건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완성되어가고 있는 하나의 통일된 계획 또는 목적을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결정은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한 합리적 결정들이며 그는 “모든 피조물이 지향하는” 하나의 큰 목표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서, 그 모든 사건들의 존재 목적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둘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숙명론은 궁극적 원인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습니다. 즉 전 우주를 통치하는 것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맹목적인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숙명론은 자연의 운행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을,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보았자 헛수고이며 어린애처럼 불평만 하게 될 미지의 부가항력적인 어떤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정론 안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고스란히 보존이 됩니다. 그러나 숙명론은 의지의 자유 선택 및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행동 역시 자연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필연에 속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숙명론의 주장처럼 불가항력적, 비인격적, 추상적 능력이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면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는 인간이 보기에 비인격적, 맹목적인 것 같은 모든 세력들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방편일 뿐, 이 세력들이 인간의 의지까지 장악한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또 숙명론이 진리라면 인간에게는 종교, 사랑, 자비, 성결, 공의, 지혜 등을 추구할 동기가 없어질 테지만 예정론은 오히려 인간에게 이런 덕행들을 사모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결국 숙명론은 인간의 회의와 절망으로 인도하는 반면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기계의 작동과 다른 것만큼, 또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함없는 사랑이 인력의 힘과 다른 것만큼이나 예정론과 숙명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스미스(Smith)는 “예정론은 우리의 생명과 마음이 하나의 수레바퀴와 같은 인정 없는 운명이나 회오리바람 같은 광무하는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장중에 달려 있다는 영광스런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말하는 비난에 대해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는 “운명이란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필연이라는 말의 또 다른 명칭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전혀 자유가 없고 필연이란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분으로 여기는 교훈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정의해 볼 때 예정이란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의 모략이나, 그것으로 모든 인간과 사물들을 제정, 통치하시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부분, 심지어 지극히 적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지혜롭고 공평하게 제정,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일 독자들이 나의 저서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만 한다면 사실 운명이란 모욕적인 용어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는 용어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어거스틴마저도 그 당시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이와 똑같은 극단적인 말로 비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교적 숙명론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관한 지식이 신(神) 자체에 대한 통념만큼이나 이 세상에 방치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사를 연구해 보면 유물론이 바로 숙명론임을 알 수 있으며 범신론 역시 숙명론과 많이 결부된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숙명론자라면 누구나 다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철저한 숙명론자가 된다면 그는 “만일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라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또 만일 내가 앞으로 수년간 생존할 운명이라면 어차피 살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어느 때까지 생존하도록 예정하셨다면 식사를 거절하는 식의 자살적 행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실 것까지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해밀톤(Hamilton)은 “예정론은 단지 외부적으로만 이교의 숙명론과 비스해 보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냉혹하고 비인격적인 운명의 수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갈보리에서 죽게 하신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공의롭고, 성결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설사 어떤 일이 잘못 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황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았거나 이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는 자는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예정론이 무엇이고 숙명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그런 실수를 범한다면 그것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는 하나의 조직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의도와 목적을 없애버리는 숙명론을 택하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섭리적으로 지배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자유이신 것처럼 인간도 인간본성의 한계 내에서 자유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성경적 교리의 예정론을 택하든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정론과 이교적 숙명론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양자택일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16장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행동과 도덕적 책임에 있어서 모순된다?

 

I. 인간의 자유행동 문제

 

  이제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란 자신의 이성적 결정으로 행동하는 지성적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모든 인간의 생애와 자연계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들의 실제적인 과정을 필연적으로 확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행동은 강요가 아닌 자신의 희망과 성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행위의 성격이 우연적이며 불확실한 것이라면 예정과 자유행위는 분명 모순될 것입니다.

  만물을 생기게 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는 무한한 의지의 지배 아래서 유한한 의지가 어디에 나타날 수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 어려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무한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죄인인 피조자의 자유 위에 두는 조화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그 사건 속에 있는 인간의 자유도 예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하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며, 그 안에는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반응하는 수많은 자유행위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주권 하에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정식으로 설명을 해 주시지 않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유한한 지식으로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들은 인간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행위자의 행위를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 속에 포함시키는데 대해 전혀 곤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도 인간의 자유를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래 일어날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불변하도록 미리 작정하셨다.”고 말한 후에 “비록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근원이 되시거나, 지음 받은 피조물의 자유를 억제하시거나, 제2 원인이 발생할 자유나 가능성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신다.”고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그 개인의 행동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현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건축을 하는 경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건축가는 먼저 설계도를 작성한 다음 일꾼들을 고용해서 공사를 진행합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자유로 일합니다. 어떤 종류의 강요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노임 또는 노동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여 그 공사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축가가 계획한 것을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완성해 놓습니다. 이 때 건축가의 의지는 그 건축 공사의 중요 의지(또는 일차적 원인)가 되고, 고용인들의 의지는 이차적 의지(또는 이차적 원인)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자유나 책임을 침해하는 일이 없이 그들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무한하신 강도(强度)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의 의지는 일차적 원이이요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으로 이 양자는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일을 합니다.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원리는 그것이 “피지배자의 동의”에 입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론 하나님을 절대적 지배자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신자의 동의를 무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받으며 주권자의 뜻을 행하기를 일생일대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II. 이 반론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인간의 자유행위력과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예정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예지를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에 생길 어떤 사건을 예지하셨다면 그것은 예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이 자유행위력과 모순된다면 예지 역시 자유행위력과 모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하면서 예정교리는 버리고 예지교리는 계속 지지하고 있으니 참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요? 유니테리안파(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는 비복음적이면서도 이 점에 있어서는 알미니안파보다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가지(可知: 알 수 있는 것)적인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자유 행위는 불확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신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유행위자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이 때 자유행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로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예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겉옷을 제비뽑은 것,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 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기자들은 어떠한 자유행위도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유다나 베드로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제자들은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한 재판관이 뇌물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과 수전노가 금괴를 단단히 붙잡고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압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예지가 아들의 행위상의 자유를 손상시킨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지식의 소유자인 인간도 타인의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언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예지하시지 못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이 예상치도 않았던 방면으로 마구 나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예지란 말은 사실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지란 미래의 행위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확실한 것을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혀 불확실한 사건을 확정적인 일처럼 예지하신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모든 사건은 확정적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예지하지 못한다고 말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교리와 예지교리는 서면 같이 서고 넘어지면 같이 넘어지는 상호수반적인 교리입니다.

 

III. 확실성은 자유행동과 일치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행위가 강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원했다면 그는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않고 그가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은 행하는 능력과 기회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 영향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결정되지만 강요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고 종종 달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유다와 그의 공범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남겨졌고, 그 사악한 성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비난했으나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행동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행 2:23). 그들이 하려고만 했다면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고 달리 행동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행했으며 그것은 또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은 서로 일치합니다.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의 일치를 증명해 주는 또 다른 논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종종 어떤 기존 조건 아래서 행동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 구출 행위는 예언적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그 일을 행할 때는 전혀 자유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행위자이지만 언제나 공의롭게 하십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구원 얻은 성도들도 자유행위자이지만 결코 범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영원토록 천국에 있으리라는 보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악마나 타락한 인간은 비록 자유행위자이지만 범죄할 것입니다. 부친은 그의 아들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아들의 행동을 미리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들은 자유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부친이 아들을 의사로 만들 계획이라면 그는 아들에게 그 길을 따르도록 격려하고, 그 방면의 책들을 읽게 하며, 그 방면의 학교에 다니게 하는 등 아들의 마음을 그 방면으로 유도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그러나 훨씬 더 무한한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로 행하면서도 확정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건의 발생을 확정시킬 뿐입니다. 행동의 확실성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작정이 동시에 행동자의 자유도 결정하는 것입니다.

 

IV. 인간의 자연적 의지는 악에 예속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어떤 외적 강요에 의해 그의 선택의 자유나 책임을 간섭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락 상태에 있는 인간이 갖는 자유란 ‘노예적 자유’에 불과합니다. 그는 죄의 포로가 되어 자진해서 사탄을 좇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능력도 의향도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유 의지’라는 말보다 ‘자기 의지’라는 말이 타락 이후의 인간 상태를 표현하는 데는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실로 스스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실수라고 해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 그는 천사와 같이 임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악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물론 루터가 가르친 교의입니다. “노예적 의지”라는 그의 저서에서 루터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강요도 받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영원부터 뜻하시고 인간이 꼭 행할 것을 예지하신 것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지는 반드시 성취되고 그의 예지는 확실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나 인간의 의지는 무슨 일이든 남에게 강요되어 행하지는 않는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지에 지배되어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는 확실불변하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또 “만일 자유의지가 그 자유를 상실하자 곧 죄악의 포로가 되어 어떤 선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 자유의지란 말은 사실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로서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후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영원불변하시고 무오하신 의지로서 만물을 예견하시고 의도하시고 행하시는 것이지 결코 있을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어떤 일을 예지하시는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가변적이요 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거나, 심지어 우리가 우발적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어 필연적이요 불변적으로 행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불가항력적이어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하나님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요 그의 예지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는 만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할 수도 없을 일을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들의 힘으로는 전혀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이 마른 자는 손을 펴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3:5), 병자는 일어나 그의 침상을 가지고 걸으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2:11), 죽은 나사로는 일어나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요 11:43,44). 그리고 인간은 믿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등의 성구를 볼 때 인간이 자초한 도덕적 무능력 때문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V.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갈 의지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적 감정, 외적 환경, 습관, 욕망, 동기 등을 다스리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십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측량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는 이 감화가 어떻게 역사하여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실질적인 것이며, 이 둘은 완전한 조화 속에서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했으나 즉시 그 명령을 한 이유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빌 2:12,13)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역시 “주의 권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라고 말함으로써 똑같은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종류에 따라 각기 특성을 부여받았으니 저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모든 행동은 이미 창조 당시에 예선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는 공통적 행동을 가졌으니 이 행동은 이미 그들이 창조될 때 받은 것으로 예선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소와 말도 역시 그들이 행할 동작의 형태가 예정되었고 식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은 네 발로 걷거나 말처럼 소리를 지르도록 예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외부에서 결정된 행동은 자유행동이 아니지만 내부에서 자기 이성으로 결정한 행동은 자유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렇게 인간의 내부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하나님의 작정 곧 예정 속에는 모든 인간이 자유행위자가 될 것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환경이나 외부적 영향 아래에서 어떤 욕망과 습관에 따라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과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자신의 이성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할 대상도 일정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작의 원인을 알고 다스리시며 또 그 행동이 어떻게 진전될 것을 아시나니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정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징키우스는 인간은 자유행위자라고 말한 후에 “인간은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작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떠한 강요도 의식하지 않으며 마치 어떠한 지배도 받지 않는 독립자인 양, 자기가 완전히 자기의 주인인 양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덧붙임으로써 이 개념을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루터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저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작정이나 정하신 바를 성취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강요에 못 견뎌서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원리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역사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의욕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은 그의 선민에게만 이런 의욕을 주십니다. 이때 선민의 자유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친구를 권하여 같이 산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 얻은 자와 구원 얻지 못한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 H. 존슨(H. Johnson)의 비유를 보면 “이백 명의 범죄가 투옥되어 있다고 하자. 나는 그들의 석방을 위해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공의가 만족되고, 법의 정당성이 입증된 죄수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옥문 빗장이 벗겨지고 그들의 절대적 사면이 약속되어 모든 죄수에게는 그들이 곧 자유인으로 출옥할 수 있다는 확약을 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이 때 내가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를 헛수고로 돌려 보내지 않으려고 이백 명 중 백오십 명을 개인적으로 방문으로 그들에게 힘과 정성을 다해 출옥할 것을 권면한다고 하자. 이것이 바로 선택이다. 이럴 경우 내가 그 남아 있는 오십 명을 옥중에 가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는 여전히 충분하고, 옥문 빗장은 여전히 벗겨져 있으며, 옥사의 대문도 여전히 열려 있으므로 걸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옥중에 있는 자들 역시 자기들이 원하기만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내가 옥중에 남아 있는 오십 명을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파는 종종 인간은 본래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덕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펠라기안의 교의를 그대로 고수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거룩한 천사의 선함, 영화된 성도의 선함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덕을 선택함에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하늘나라와 같은 상태에서는 덕이란 칭찬할만한 선(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인간의지를 고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힘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수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지의 극치는 아닙니다. 그래서 모즐리(Mozley)는 “의지의 초고로 완전한 상태는 필연의 상태이다. 선택의 능력은 순전한 의지의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요 결함이다. 의지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증거는 의지가 선악을 앞에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니가?”라고 말합니다. 현세에서는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는 하는 은혜가 한결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한 자라도 누누이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내세에게서는 은혜가 한결같이 부어진다든지 아니면 완전히 거두어지든지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선을 결단하든가 아니면 악을 결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력과 인간의 행동력이 연합하여 한 행위를 산출하게 되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방법을 고찰해 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의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은 인간의 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성경 전체가 그 모든 부분에서, 즉 표현 양식에서든 교훈의 실질에서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해밀튼(Hamilton)은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각 성경 기자를 기계처럼 사용하셨다거나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받아 적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배하시어 그들이 기록한 것이 진실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기록으로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지혜, 언어 및 표현 양식을 사용하게 하시되 그들이 기록할 때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오류로부터 지켜주시어 하나님이 모든 세대에 걸쳐 그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발적인 일”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기는 사건이 정확한 예지의 객체가 되거나 사전준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모순입니다. 그 일의 성격상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톱레이디(Toplady)의 말처럼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그가 운명의 연신을 예배하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사실상 섭리의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쫓아내는 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실 수 없다면 그는 수많은 인간의 자의적 행동결과에 대해 항상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니 얼마나 분주하실 것입니까? 만일 인간이 실제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회심시키시기 위해 마치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하듯 여러 개의 안을 마음에 품고 가서 제일 안(第 一案)이 실패하면 제이 안, 제삼 안을, 이런 식으로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자유행위자의 행위가 전혀 불확실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미래를 예지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날마다 접하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수없이 많이 놀라면서 그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비합리적이며 비성경적인 견해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부인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신다는 것과 인간적 견지에서는 아무리 불확실하게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확실하고 부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견대는 그 타당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자신을 제한하사 인간의 미래 행동 중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론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이론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의 악행을 눈감아주는 부모의 어리석은 행동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든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서든 제한을 받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유한한 하나님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죄인을 회심시키려고 열심히 분투하시지만 그들의 자유행동력을 무시하지 않는 한도에서 권면할 뿐이며 그 이상은 행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의 이론은 마치 영원히 서로 투쟁하는(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 없으므로) 선과 악의 두 원리가 있다고 말한 옛 페르시아 인(바사제국)들의 세계관과 그 의미하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그 통치권과 통치력을 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피조자를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권 밖에 두는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피조자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지와 목적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셈이 됩니다. 이 이론은 또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죄를 범할 수도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전복되고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마침내 온 세계가 악으로 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VI. 의지가 결정되는 방법

 

  인간은 이성적 행위자이므로 그의 독자적 행위에는 틀림없이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의지는 반드시 최강의 동기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만일 의지가 약한 동기에 의해 결정을 내린다거나 아무런 동기도 없이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원인 없어도 결과가 생길 수 있자는 말만큼이나 모순된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음을 양심이 가르쳐주며, 또 우리가 어떤 일을 해 놓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강한 다른 동기가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는 그다지 강한지 않은 동기나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기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산출해 낼 만큼은 강한 것입니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다른 한쪽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의 동기는 매우 약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일을 선택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세력이 그 동기에 인력(引力)을 가하기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픈 이를 기꺼이 뽑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아파서 정말 뽑아버려야겠다는 더 강력한 이유가 첨가되기 전에는 그 이를 뽑아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어떤 일을 결정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산에 거주할 것을 선택한 자가 동시에 서울에 거주할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의 결의는 그의 천성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욕구, 성향, 기호, 지식 및 성격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요, 정신 및 물질의 법칙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상에 진술된 모든 것의 영향 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장 강한 성향 및 동기가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는 대로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그 당시에 우리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한 것들이 곧 우리의 의지를 결정하게 한 것들입니다. 핫지 박사는 “의지는 어떤 필연적 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기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마음의 선행(先行)적 상태 즉 심중의 가장 강한 동기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그의 결의가 그의 마음을 의식적(자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위가 자신의 이성과 마음에 따라 결정, 지배된다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의한 바가 그의 성격을 근거로 해서 혹은 그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의 결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의 성격이 선하다든지 혹은 악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느니라.(마 15:18)”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거나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무의 질(質)대로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요, 그 나무의 질이 열매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인간의 행동이 그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가 변론을 일삼기 위해 인간의 의지는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인간의 의지는 인간 성격의 산물이요 표현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나 살인자가 될 어떤 일을 결의한다고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를 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그를 대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결의는 오성(悟性), 원리, 감정 등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내려지지 않는 결의라면 그것은 어리석은 결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결정한 후에 의지가 선악 간에 어느 쪽도 결정하지 않은 무결정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인간에게는 동료 인간을 신임할 근거가 없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의지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자유를 갖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외부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무법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상황 아래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의는 인간성의 표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내세에 선한 자들은 영구히 선하고 악한 자들은 영구히 악하리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행위력이 필연적으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천국의 성도들도 다시 범죄하여 타락한 천사들처럼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선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상의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의지를 고집하거나 투쟁하는 일이 없으며 훨씬 수월한 물리적 법칙 아래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이나 동기를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내세에서도 역시 사악한 것이 영구적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감화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고칠 수 없는 그 완악함으로 더욱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히 악의, 사악, 증오의 성향을 갖게 되어 완전히 ‘악’의 신민이 되고 맙니다. 또 만일 자유의지 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사후의 회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지옥에 들어간 자 중에서 어떤 자가 그 고통을 겪어보고 나서 자기의 과오를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설마 현세에서의 경미한 형벌도 인간을 죄로부터 돌이키는 효력이 있는데 설마 지옥에서의 준렬한 형벌에 그런 효력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추측합니다. 추측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의지는 그의 성질과 주어진 유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칼빈주의의 원리만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아무도 이것을 건설 수 없다는 즉 구원 얻은 자와 멸망자의 상태는 영구적이라고 단정한 성경의 결론과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지 결정의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큰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과시하는 자유를 좀 더 상세히 검토해보면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된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계의 법칙, 자신의 특수 환경, 습관, 과거에 받은 교육, 사회적 관습, 처벌 또는 비난에 대한 공포, 현존하는 욕망, 야심 등 이 모든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어느 순간에든지 인간은 그의 과거가 만들어 놓은 그인 것입니다. 즉 인간은 역사적 산물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기 성질의 지배 아래 행동하고 또 그 행동을 그의 마음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피조자에게 가능한 자유”를 가질 뿐입니다. 이외의 어떤 자유도 그것은 무질서를 산출해 낼 뿐입니다.

사람은 금붕어가 든 어항을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붕어 자신은 자유로우며 어항 속에서 마음대로 헤엄쳐 다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무 조각이나 돌조각 또는 금속조각을 육안으로 보면 그것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자나 원자 및 전자를 볼 수 있는 강력 확대경을 통해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 권내에서 빙빙 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정과 자유행동력은 큰 성전을 떠받들고 있는 두 기둥인데, 이 둘은 인간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구름 위에서나 서로 만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두 평행선뿐이고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저편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이 둘은 서로 합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는 이 둘을 서로 결합시킬 수도, 결합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데, 알미니안파가 어떻게 이 둘을 서로 교차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건을 일으키는 절대적 결정권이 인간의 수중에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용인한다면 그 자유의지는 신적 자유의지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즉 제1 원인, 행동의 원천)처럼 되어 자유의지의 수효만큼 반신반인(半神半人)이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이러한 독립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물론적 철학자나 형이상학적 철학자들도 칼빈주의가 부인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 ‘자유의지’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모든 결과에는 그 결과에 상당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추론합니다. 따라서 의지의 행위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동기란 외부의 법칙과 사물이 인간 심성에 반사된 것을 의미하므로 의지의 행위가 동기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곧 자유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VII. 성경의 증거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완전히 조화되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 통치자요 제1 원인이신 반면 인간은 그의 성질의 제한 속에서 자유행위자요 제2 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인간에게 시키고자 계획하신 일을 인간이 자유로 임의적으로 행하도록 인간의 사고와 의지를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상호 협력한 전형적인 실례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에 의해 후에 총리가 되 기근 때 식량을 공급하는 큰 사역을 감당했던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의 형들은 자기들이 자유로 그런 행동을 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요셉과 상봉했을 때에 자기들의 죄를 자인한 것입니다(창 42:21, 45:3). 그러나 신앙을 갖고 있는 요셉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말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 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형제들은 그 악한 본성대로 동생을 이방의 노예로 팔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한 인연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 그들의 계획적인 악이 선으로 변하였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감소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행위는 지극히 부당한 것이었으나 사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나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롬 9:17, 출 9:16, 10:1-2)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을 제어하심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족속들이 그 땅을 엿보지 못하도록 제어해주셨고(출 34:24),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스 1:1-3). 또 성경에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는니라.”(잠 21: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수월하게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범인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사야 10:5-15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서로 일하고 있는 현저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화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그의 뜻은 이같이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ㅅ아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는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이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음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일반이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구에 대하여 라이스(Rice)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성구의 명확한 의미는 첫째, 앗수르 왕이 비록 교만하고 불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치 사람 손에 들린 도끼나 톱이나 막대기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요, 둘째 앗수르왕은 자신의 자유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자의로 활약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행했다는 말은 본문에 없고 단지 자기 야심을 이루려고 했다는 말만 있으니 곧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이 비록 악한 왕의 행위를 이용하여 결국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신다 할지라도 그 왕의 악행은 그 행위대로 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 앗수르 왕을 사용하셨다. 그런 다음 앗수르 왕의 완악한 계획을 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여 그들의 자유행위력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그의 계획을 수행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수행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 아니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라면 누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르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행 13:27-29)

십자가 사건만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르는 여러 사건들도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군인들이 제비뽑은 일시 22:18, 요 19:24),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신 포도주를 드린 일(시 69:21; 마 27:34; 요 19:29), 백성들이 예수를 조롱한 일(심 22:6-8; 마 27:39), 예수를 강도와 함께 매단 것(사 53:12, 마 27:38), 죽은 예수의 뼈를 꺾지 않은 것(시 34:20; 요 19:36), 창으로 찌른 것(슥 12:10, 요 19:34-37) 등이 있고,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운명해 가는 예수를 향하여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저들은 아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를 읽어보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결부된 모든 일들은 사사건건 다 예언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들은 발생하기 전 수세기 동안 구약 예언서에서 자세히 예언된 것이므로 영원 전부터 예정되고 확정되었음이 분명하며, 예정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통해 성취되었고, 또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임의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행 13:27,29, 3:17). 만일 역사상 최악의 사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보다 적은 사건들도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 있으며, 그것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잠 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렘 10: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출 12: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스 6:22-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스 7:6-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에스라)니라.

사 44:28-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계 17:17-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삼상 2:25-그들(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왕상 12:11,15-네 부친(솔로몬)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르호보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왕이 이 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삼하 17: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니라.

출처: 행함과 믿음/Chukang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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