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 얘기를 해야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이제부터 예정론 시리즈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다.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꺼내기에는 그리 인기가 없는 주제이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 하기 알맞은 주제 아닌가? 5세기, 어거스틴은 자신의 편지에예정론은 설교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누가 그런 방해꾼을 원하는가? 16세기, 칼빈은 설교자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나 천지창조를 설교하는 만큼으로 예정을 설교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파하였다.

우리는 예정론을 이야기하거나 설교해야 하는가? 답은그렇다!”이다.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없다면 성경도 존재할 없다.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았다 ( 12). 이스라엘은 지상 만국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 ( 4:37; 7:6-8; 105:6). 포로기 새로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 ( 41:8-9; 42:1; 43:1-7; 44:1-2; 45:4). 예수님은 예정을 가르치셨다 ( 11:25-27; 13:11-16; 4:11-12; 6:37, 66; 10:26-30; 14:1; 17:6, 9, 벧전 2:5-10). 성경적 교리인 예정론을 우리는 이야기 밖에 없는 것이 .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618년부터 1619 사이, 네덜란드의 도르 트레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럽의 신학자, 목회자, 장로 등이 모여 알미니우스 논쟁을 다루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논쟁에 답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계획하심으로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은 신적 선택에 관한 가르침을 선포했고, 성경에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도 가르침을 분별력을 갖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확고히 설파해야 하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필요하게 탐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력 넘치는 당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함이다.” (도르트신조 1.14)

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방법론을 위한 기본적 원리들을 살펴보려 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거나 설교할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9장은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서 구분되어 크리스천 회중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는 유대인들은 약속의 자녀들인 반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 ( 9:3; 6-8). 바울은 이같은 개념을 또다르게 묘사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다에 모래 같을지라도 소수의 남은자 무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 9:27).

이것은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 어떤 대상들이 이를 듣는지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강퍅하여 예정론을 비웃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참되게 궁구하는 이들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의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믿음이 강해져 그와같은 교리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또다른 이들은 믿음이 약해져 의심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차이점들을 지닌 성인들에게 말하는가? 아니면 청중들 속에 어린아이들도 섞여 있는가? 그런 회중들에게 말할 때, 그 속에는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참된 신자들도 있고, 마치 위선자들마냥 믿는 척만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명심하라.

 

경외감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바울은 로마서 9:20-21에서 경외감을 갖고 예정론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이것은 바울이 9장에서 논하는 내용의 절정 부분이다. 그는 옛언약 백성들, 자신의 동료 유대인이 보이는 불신앙을 말하면서 논의를 펼쳐간다 (vv. 1-5). 바울이 언급한 첫번째 반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졌는지의 여부였다 (v. 6). 바울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이래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와 진실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들” (v. 6), 그저 아브라함의 외적인 육신의 자녀인 자들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참  자녀들 (vv. 7-8) 사이의 차별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역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문제로 되돌아가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v. 11).

그 다음 반론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 반론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v. 14)라고 답한다. 그는 어떤 사색적인 것이 아닌지 성경의 인용을 통해 답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 (v. 18).

하지만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v. 19). 이같은 반론이 들리지 않는가? 예정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같은 반론에 바울은 어떤 철학적 답변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다.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다 (vv. 20-21).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비에 쌓인 주제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 교리를 경외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 9-11을 바울이 어떤 식으로 마감하는지 주목해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11:33).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논할 때 항상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 모두를 억제해야하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는 지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놀라움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말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패하셨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다루신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예정은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런 반론들을 저지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v. 20).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토기장이에게 권이 없느냐?” (v. 21). 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는 귀히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그릇” (v. 21)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영화로우시다. 결국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 영화로워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vv.22-23).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드리기 위한 행위인가? “찬송하리로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1:3-4).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함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1:6).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차고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 소서 1:12 14절을 통해 번이나 반복하여 송영을 노래한다.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 , 로마서 11 36절로번역 있는 것인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11:36).

 

우리의 안위를 위해....


마지막으로, 예정을 말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와 세계를 위한 어떤 안위를 찾을 있는가?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을 바로 우리 앞에, 개인의 역사에 정치시킨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9:24).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불공평하신 분으로 비난하지 말라.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 참소하지 말라. 그분을 믿으라.

하지만, 여전히 반론하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예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정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예정하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때 나의(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내 백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 9:25-2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로마서의 순서를 따르라. 먼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고민하라.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한 다음 죄와 싸우라. 8장까지 등장하는 십자가와 고난 아래서 그대는 9, 10, 11장을 통해 미리아심을 배우게 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안위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정론을 말해야 한다. 예정에 대하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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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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