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3: 왜 누군 믿고 누군 믿지 않는거지?

 

이 예정론 시리즈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확고한 기본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진리들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들이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이요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예정론을 오해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 교리를 온화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 나는 또다른 기본적 진리들의 토대를 마련해 보려 한다. 이 진리들은 예정과 관련하여 그 대상과 의미, 시기와 이유 등 실제적인 주제들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인간의 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등을 알고 있는데도, 왜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누군가는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두개의 반응이 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18, 36)

예수님께서 오천명(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계수한 인원)을 먹이시고 난 후  무리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만 남게 되었다. 예정의 이유를 살펴보면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과 예정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이야기해 보자.

 

* 믿음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신념, 소망을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말할 때 복음을 “받는다(receiving)”고 하거나, 좀더 인격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embracing)”고도 표현했다 (도르트신조 1.4항). 이것은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음을 어떤 정신훈련이나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받는다”, “영접한다” 등의 말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가? 믿음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 말은 인격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되 그분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허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요한복음 1:11-12에서 요한은 이렇게 진술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묘사가 자기자신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받고 영접하고 있는가?

 

* 왜 믿음이 필요한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요 3:16), 영생을 얻으며 (v. 16), 구원얻을 수 있기 (v. 17) 때문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다. 바꿔말하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정죄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우리 머리위에 임하였다 (v. 36).

믿음이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죄악의 처지와 그 가운데 행하는 일, 임박한 정죄 등을 위한 치료책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히 11:6),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 믿음의 복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저를” (v. 16), “아들을” (v. 36) 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믿음의 복들에 관한 것이다. 복(단수)은 예수님 당신이시고, 복들(복수)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들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정죄와 진노에 대비하여 영생의 복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우리가 정죄와 진노,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받고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즉, 영원한 사망, 혹은 정죄)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아래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떻게 믿음이 하나님의 예정 사역과 연관되는지 설명해 보려 한다 . 다음의 의문을 설정하여 설명을 이어가 보자. 만약, 믿음이란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이는 멸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을 받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초두에 그리스도를 받는 모든 자, 곧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고 설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앞서 발생하는 일을 언급하며 심화된 내용을 설명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3). 여기서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요한복음 3:6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과 3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죄성 안에 불신앙의 원인과 잘못이 포함되었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리 없고,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야고보는 이렇게 진술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니라” (약 1:13). 불신앙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 (엡 2:1-3). 우리의 본성은 훈련되지 않은 개와 같아서 사납고 통제 불능이며 본능대로 행동한다. 우리는 그렇게 본성과 실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개는 따로 달리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다. 그 개는 그냥 달리고 싶을 달릴 뿐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우리를 예수 안에 믿음을 놓으려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반면, 믿음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당신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살리신다 (엡 2:4). 에베소서 2:8-9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9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 13:48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왜 그런가?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받는 선물 같은 것도 아니요, 이 어른들이 저 어른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니다.

 

* 믿음의 영원한 근원

 누구는 믿고 또 누구는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 당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을 인하여 찬송하는데 (v. 3), 여기서 그 모든 신령한 복은 예정의 복 (vv. 3-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복 (vv. 7-12),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인치시는 복 (vv. 13-14) 등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v. 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v. 4) 사랑 안에서 예정하시는 복 (v. 5)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v. 5)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이라거나 혹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의지에 따른 선택인 것이다.

11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얻은 이들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 유익을 우리가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 기업을 물려받았는가? 11절은 계속해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내가 진리와 믿음에 대해 씨름하고 있을 때 말그대로 외면하던 구절 중 하나였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기로 예정하신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역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목적하신 바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 강퍅한 마음을 누끄러뜨리시는 하나님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를 고민할 필요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 의문이 바로 일반적인 반론, 혹은 오해이다. 그 답은 영원한 예정을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어떠함에 상관없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당신을 믿게 만드신다.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일시적인 믿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13:48을 기억해 보라. 바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어떻게 이방인들은 때맞춰 영원한 작정으로 믿음을 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쓰고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14).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기로 루디아를 예정하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르트신조가 놀라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까닭이다. “그 결정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뜨리시는 은혜를 베푸사 믿음을 얻게 하신다.” (1.6항)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영접하는 필수적인 방법인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또한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돌같이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그리고 이것은 그런 역사를 하실 수 있고 기꺼이 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격려가 아닌가?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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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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