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三位一體) / 에드윈 H. 파머


이 책에서는 주로 성령의 다각적인 역사(役事)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이 첫 장은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하여 진술하되 성령에 관하여 네 가지 명제로 고찰한다.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성령을 한 인격으로 믿는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의 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한, 소위 기독교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성령을 "그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이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제 삼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에게서 몇 가지 구원의 큰 축복들을 빼앗는다. 더구나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성경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의지와 감정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비인격적인 사물은 이런 성질들을 갖지 못하나 하나님의 영은 가지신다. 바울은 성렁께서 사고력을 가졌음을 전제한다(이하 모든 성경 인용은 '개역 개정판' 성경임).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여기서 바울은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가질 수 없고 인격만이 가지는 지식이 성령께 있음을 밝힌다. 성경도 또한 성령께서 의지의 인격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려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다(행 16:7). 또 성령께서 많은 선물들을 신자에게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또한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감정을 가지셨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4:30은 성령께서 슬픔을 가지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또한 로마서 8:26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을 다른 인격들과 병치(竝置)시킴으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을 때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이 인격이심을 지적하셨다. 야고보도 초대 교회에 어떤 지시를 내리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고 썼다. 성령께서 자기나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명백하다.

 

더욱이 성령께서 비인격적인 세력뿐이라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의 권능으로"(눅 4:14)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말함은 무의미한 말의 중복일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오직 그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靈感)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도하시며, 기도를 인도하시고, 우리 가운데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을 맡기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그를 대적하거나, 멸시, 훼방 등으로 그를 불쾌하게, 또는 슬프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해(害)를 자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쪼록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말고 오히려 믿고 그 사실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한 인격으로는 믿되 그를 한 피조된 인격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이 비인격적인 "그것"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성부보다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신적 속성은 곧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표(標)가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사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는 또한 전지(全知)하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 그것을 암시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로 믿게 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나아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말할 수 있다. 시편 기자(다윗)는 웅변적으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여 그가 하늘에 오르거나, 음부로 내려가거나, 바다로 피하거나, 밤의 흑암 중에 숨는다 해도 곳곳마다 성령(주의 영)이 거기 계셔 결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그는 말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신도들 안에 거하며, 많은 신도들은 각자 안에 그의 임재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성자와 동역(同役)하신 성령께서 영원한 신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어구를 섞바꾸어 쓰는 사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끝으로, 대사명 위임 시(大使命委任時, 마 28:19)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에서와 같이 성부,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병기(竝記)한 사실은, 성령께서 다른 양위(兩位)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피조물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그처럼 긴밀히 연합된 표현으로 한데 묶는다면 도무지 조리가 맞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영감의 권위 있는 일과 그리고 각 사람 마음속을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였으리라. 그가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사실을 고마워함이 마땅하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位)이시다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믿으나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각이(各異)한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세기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 때에는 성부로서, 그 후 역사상에는 성자로서, 마지막에는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처음엔 성부로, 다음엔 성자로, 세 번째로는 성령으로 불려지는 셈이다. 즉, 성부가 성자로 변하고, 다시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 성경의 계시에서 이탈된다. 어떤 성경 본문은 한 하나님의 단순한 변모가 아니라 각이한 삼위의 존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때를 예로 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에 앉았다고 했으니(마 3:16-17), 이들 삼위의 동시 현현(顯現)은 하나님을 단순히 단일(單一)하다고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3도 하나님의 삼위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위가 아니고 삼위이심은 확실히 우리에겐 축복된 일이다. 그것은 풍성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상자로부터 나오신다(發出, 發生)

 

삼위일체의 삼위 간에는 일정한 관계와 차서(次序)가 있다. 이 삼위가 똑같이 하나이시라고 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고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 일 위와 제 이 위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성령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다른 두 위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있으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영의 나오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이 말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여기에 성경 말씀을 되풀이할 뿐 그 이상 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가 성령을 낳으셨다거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낳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부들이 암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성부의 손자가 되는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관하여 조심성 있게 '낳다'라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信經)은 이에 대해,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고 표현하였다. 이 '나오신다'란 말은 예수께서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의 이름이 또한 이 삼위 간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를 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 주며,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의미 하듯이 성령이라는 이름도 다른 두 위(位)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으니 곧 영(靈)이라는 그 이름은 불어넣었다(spirited or breathed)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혹은 그로부터 불어넣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해도 그 두 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음은 마치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시 2:7, 행 13:33)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낳음을 입은 것같이 성령도 영원히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에 신비가 있다. 그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또는 '불어넣어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보다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삼위의 다른 두 위와 영원히 유지하는 관계를 표시할 따름이다.

 

또한 성령이 다만 성부께로부터만 나오지 않고, 성부, 성자 두 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5:16에서 분명하거니와,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은 그처럼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사 제자들 위에 불어넣었다('숨을 내쉬며')고 하는 이런 구절들(요 15:26, 16:7, 20:22)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한 번 불어넣는 것은 영원히 불어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 삼위 내의 관계에서도 가지는 일정한 권위를 반영한다. 그 위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 불려질 뿐 아니라 "아들의 영"(빌 1:19)으로도 불려진다. 이러한 성령의 다른 두 분과의 관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일, 제 이 위가 아니고 제 삼 위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으니 맨 처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입었으니 제 이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니 제 삼 위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차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서, 처음 두 위가 연속하여 전면에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현저하게 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세상에서 더 뚜렷하였던 분은 아버지시다. 창조에서 주된 영광을 받으신 분이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주로 관계한 분도 그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자 아버지는 그처럼 현저히는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성령은 아직 충만히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만 더욱 뚜렷한 역할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고 승천하시자, 삼위일체의 제 삼 위께서 더 뚜렷이 등장하셨다. 이와 같이 삼위께서는 삼위일체 안에 일정한 차서가 있어서 그 차서는 역사 가운데 현시되어 각 위는 바로 삼위일체 내에 발견되는 차서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려 나오기(breathed out) 때문에 오순절에 교회 위에 불려 나온(임재하신) 분도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성령이었다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성육하신 아들이어야 하는 사실과 상응한다. 같은 모양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 위가 삼위일체 중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또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 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비록 우리가 이것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계시한 것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교회를 인도하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다른 두 위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진다는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광범위하다. 1054년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었다. 비록 저변의 요소가 많았으나 서방 교회들이 톨레도(Toledo) 회의(589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 "와 아들(filioque)"=("and the sun") - 이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용어 - 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는 반면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었던 것은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었다. 이 차이의 결과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거대한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여 만약 1500년 전 교부들이 이것을 작성치 아니하였던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지식을 감사해야 한다.

 

더욱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filioque(and the sun)"의 부정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며, 성령의 성화의 일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은 뒷전으로 돌리게 되며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될 우려가 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동방 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회의와 대회에서 행해지는 긴 신학적 토의가 때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 토론이 언어상의 문제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결론들은 위로부터 아래 대열에까지 배어든다. 우리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는 고마운 계시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위에 성령과 그의 사역을, 체험을 통하여 알도록 힘써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 장(章)과 다음 장들이 씌어졌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9-30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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