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 에드윈 H. 파머

 


성령의 역사를 철저히 알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때 아주 놀랄 것이다. 성령을 중생과 성화와 관련하여서만 생각하곤 했던 사람에게는 그가 창조의 완성자요 일반 은혜의 매개자(媒介者)요 특별계시의 주(主)요 그리스도 교회의 효과적인 건설자임을 깨닫고 나면 다소 놀라울 것이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또 다른 큰 역사, 곧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의 그의 활동을 살피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제 이 위(第二位)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시고, 알 수 없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편재(遍在)하시다. 때가 차매 그는 자진하여 땅에 와서 인성을 취하사 동시에 하나님이며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신 점에서 일찍이 땅에 산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이 커다란 진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필요를 의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그는 성령이 필요치 아니하리라고 어떤 이들은 거론하였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이신 사실 때문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미미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치우쳐 강조하였거나, 그의 인성을 과소평가함으로 일어나는 오류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성령의 영향은 적다. 삼위일체의 제 이 위는 제 삼 위와 동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성령의 끊임없는 임재가 필요하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그의 인성이 그의 신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인성이 변하여 신성과 융합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이에 대한 아름답고 짧은 규정을 보려면 451년에 주의 깊게 선택된 언어로 쓰여진 칼케돈 신조를 읽으라). 두 성질의 연합은 그의 신성이 인성에다 전능이나 전지 등의 신성을 부여하여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되기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만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인성에로의 전이(轉移)가 일어나 예수께서 한 신성과 한 인성인 대신 두 신성으로 끝나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히 사람이시어서 그는 아기에서 - 소년 - 성년으로 자랐고,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았으며(히 4:15), 자기의 재림의 날과 때를 알지 못하였고(막 13:32), 하나님께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음을 인하여 부르짖으셨다(마 27:46). 그의 두 구별된 성품은 상존(尙存)했다. 그는 동시에 완전히 하나님이었으며 영원하였으나 인간적인 유한성도 함께 가지셨다.

예수께서 완전히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 생애에 성령의 역사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충분히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 수육(受肉)에서부터 그의 최후 영화(榮化)까지 줄곧 역사하셨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수육(受肉)

 

령은 예수의 인간 생활의 맨 처음 출발인 그의 성육 시에 요구되었다. '수육(受肉)' 또는 '성육(成肉)'이라는 말은 삼위일체의 제 이 위께서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행위를 뜻한다(요 1:14). 이는 마태의 글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라고 한 것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고 한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으로 된 행위다. 성령이 예수 잉태의 원인이었다. 생명의 씨를 마리아 태(胎)에(신비한 방법으로) 심은 분은 성부도 성자도 더구나 요셉도 아니요 성령이시었다.

 

이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位)들은 이 성육에 아무런 몫을 하지 아니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조의 문제에서 본 것같이 삼위가 모두 이 세상 만사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 토대에서 성 삼위의 두 위께서 다른 한 위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말함은 타당하다. 예수의 잉태도 그렇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라고 하신 말씀이 증거하듯이 성부는 수육의 공역자(共役者)이시었다. 바꾸어 말하면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인성(여기서는 몸이라 불리다.)을 예비하셨다. 아들도 자신의 수육의 공역자ㅏ였다(육신이 되사). 그는 우리처럼 수동적으로 나지 않으시고 농동적이었다. 그는 즐겨 자원하여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기를 택하셨다. 바울은 이를 드러내어 말하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 7)라고 하였다. 요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성령과 같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참여하셨다.

 

비록 수육이 하나님 삼위 모두의 일이지만 그것은 특별히 성령의 역사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그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누가가 말한 대로 그는 예수의 잉태를 일으킨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는 아버지나 아들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의미에서 성령이 수육의 원조이며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마 1:18) 따라서 "성령의 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렇다고 성령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 됨은 존재하게 한 것 이상으로 된다(Fatherhood depends upon more than causing something to be). 그렇지 않으면 소년이 만든 모형 비행기를 소년의 아들이라, 또는 의복을 재봉사의 딸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제 삼 위가 아니요 제 일 위이시다.

 

이 성령에 의한 잉태는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보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인 원죄와는 무관하게 하였다. 인간은 그 잉태와 탄생을 통하여 거룩하지 못하고, 간사하고 더러우며, 한가지로 죄인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잉태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었다(히 7:26). 사람은 죄 중에 잉태하여 출생한다(시 51:5).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룩한 중에 잉태하여 출생하였다.

 

이를 더 상론(詳論)하자면, 각인은 원죄의 두 요소 곧 에덴 동산에서 그 대표로 행한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죄책과 모든 악에 기울어진 부패한 성품을 유전받았다. 이 원죄는 스스로 실제 범행(자범죄: 自犯罪)하기 전에 인류 각자가 출생시부터 공통적으로 유전받은 것이다. 그가 타고난 그 부패한 성품은 하나님께서 개입치 않으시면, 처음엔 무구(無垢)한 듯 보이나 결국 그 추한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이 이중적인(아담의 죄책과 부패한 성품) 원죄로부터 보전되었다. 마리아가 아니고, 그가 무구히 잉태되었다. 그는 참 사람이요 "모든 일에 우라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고후 5:21),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2),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벧전 1:19) 같았으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히 7:26)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사람은 출생과 함께 적어도 두 가지로 죄인이 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나심으로 인하여 이런 죄에서 무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모든 인류가 받는 아담의 대표적인 죄책을 받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그의 인성은 흠 없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스도의 이 점 없는 순결성은 요셉의 참여 없이 무구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잉태되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그 맨 시초부터 필요하였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하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탄생되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의 인성이 아담의 죄의 유죄성과 오염에서 보전되어 그가 우리 구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

 

성령께서는 예수를 모든 형태의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의 인성에 거룩함의 시여자(施與者)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선언에 포함되었다. 왜냐면 사람이 죄가 없다면, 그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영혼에는 진공 상태가 있을 수 없다. 악의 결여는 거룩함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의 인성 안에 역사하신 거룩함의 시여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같이 성령이 자연적, 신령적 모든 생명의 주라는 사실의 의미도 포함되었다. 그는 지적, 미적, 도덕적 재능의 시여자다. 이는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성에도 참되다.

 

더구나 요한은 예수께 관하여 말할 때 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특별히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분적으로 주시고 충만히 주시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 완전히 충만히 주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만 관하여 말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음을 뜻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시는 이상으로 그리스도 안에 오사 거하셨다. 사실 예수꼐서 자기 몸을 유대인들이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요 2:19) 하심으로써 자신을 성전에 비하셨을 때 그가 이 내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도 믿어진다.

 

 

3. 그리스도의 성장

 

성령이 인간 예수 안에 한량없이 거하신 것도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는 성경 중 가장 매력적인 기사의 하나이며, 또한 종종 특히 현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모든 공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 성장을 아주 예리하게 드러내어 말하기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고 하였다. 누가는 신체적으로 "아기가 자라며" 또 지적으로 "강하여"졌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여 말한 듯하다. 자라며 강하여짐이 동일한 일, 곧 신체적 생명에 관한 말이라면 중복체(重復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가복음 1:80에서 동일한 말("아기가 자라며...강하여지며") 이 "강하여지며"란 구에 "성령이"가 덧붙여져서 세례 요한에게 사용되었다. 이 성장은 2:52에 의하여도 확증되는데 거기서 누가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예수의 지적, 육적,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하여 준다. 그는 아담처럼 어른으로 태어나서 아기인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고 참 아기로 났었다. 그는 보통 아이들처럼 영아기에서 포복기로, 걷고 말하는 유년기로, 자라며 배우는 소년기로 마침내 완전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했다. 누가복음 2장 한 장에서 누가는 그리스도를 처음 12, 16절에선 "아기(baby)", 다음 17, 40절에선 아이(child), 그리고 43절엔 "아이 - 소년(boy) -", 마지막으로 52절엔 "예수"라 칭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인성은, 신성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전지, 전능, 무한 등의 신의 속성을 부여받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명시하듯이 아기로 태어났으며, 위의 40, 52절이 명백히 선언하듯이 지혜가 자라갔다. 그는 영적으로도 자랐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는 실제로 "자라 가며...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시었다. 이 모든 성장이 오직 예수의 인성에만 적용됨을 기억한다면, 이 큰 신비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신성은 항상 완전하시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나 조금도 자랄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성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자동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또한 그 모든 온전한 성장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신분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었으므로 인간으로서의 그가 전지(全知)하였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참 인간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성인으로서 본격적인 사역 중에라도 자신의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막 13:32). 이 영적, 지적 성장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사야는 이것을 예시하며 기록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곧 예수)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라고 하였다. 요컨대 예수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 위에 강림하여 그를 어린 아기와 소년으로서 자라며 강해지고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장해 가는 소년 예수에게는 성령이 필요하였다.

 

혹시 누가 예수께서 한량없이 성령으로 충만하시면서(요 3:34) 영적으로 자란다는 사실에 의혹을 품는다면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한 무죄와 완전한 거룩함 간의 구별과 예수께서 아기로부터 성년으로 자라 갔다는 사실에 있다. 아기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과 거룩함의 모든 성향과 의지를 가졌으나, 단지 그가 유아인 때문에 어른이 하듯이 인성의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행사할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아기였을 때 자신이 12세였을 때처럼 신학자들과 토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마음이 윤리적 문제를 이해할 만큼 발달되지 못하였기(발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선악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는 아기였을 때도 성령이 내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기질은 비록 표현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완전히 거룩하였다. 이 거룩한 성품은 잠재하여 있었고 그 행사(行使)는 그의 마음이 자라고 발달함에 따라서만이 따라올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순종을 배워야 했다(히 5:8). 이는 그가 한 번이라도 불순종하여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 오직 그는 성령께서 그 안에 이미 심으셨으나 그가 아기인 동안 결실치 못하던 선천적인 거룩한 성향을 발달시켜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을 위하여 필요했을 뿐 아니라 성령은 또한 아기와 성숙하여 가는 젊은이로서 전 성장기를 위하여 필요하였음을 본다.

 

 

4.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중보자로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별되고 능력을 받은 수세(受洗) 시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함을 입고 자라며 그의 사생활에서 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신 후에도 아직 그는 공생애를 위하여 새로운 면으로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거룩한 생활과는 별도로 그는 메시야 -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이 성령의 은사는 수세 시에 임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1, 22)라고 쓰여 있다. 이 일 전에는 복음서 아무 곳에서도 예수의 사역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의 탄생과 소년 시절에 관하여 읽을 뿐이다. 그런 후로 우리는 그의 전도와 기사를 행하신 사역에 관하여 듣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받으심에 대한 누가의 기록 직후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었다고 그는 명언(明言)한다(3:23).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수세 시에 성령이 강림하심은 그의 공생애를 위하여 공적으로 자격을 갖추게 할 목적에서였다는 결론을 짓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의 공직을 위함인 줄 의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위와 같이 세례를 받음과 동시 성령이 그의 위에 강림한 직후 그는 그의 첫 강설을 나사렛에서 하실 때에 본문으로 이사야 61:1 곧 그 선지자의 예언인 "주의 성령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는 말씀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앉으신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그때 그로 그의 공적 사역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능력 주시려고 그 위에 오셨던 것이다.

 

성령께서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기사를 행하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의 갈등 중 한 장면에서 하신 말씀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서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 하므로 이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 이적들이 예수를 통하여 이뤄졌지만 참으로 그 시행자는 성령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여러 번 이적을 행하셨을 때 아버지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사람으로서의 그가 성 삼위의 제 이 위(신으로서의)로부터 초자연적 능력을 받은 때문도 아니요, 오직 성령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사도행전 10:38의 베드로의 말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꼐하셨음이라." 함도 이 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례받으심과 전도와 이적 행하심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권능을 받고 자격을 구비하여 그의 공직에 들어갔음을 보여 준다.

 

 

5.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위대한 역사의 또 하나는 예수의 시험과 관련하여 니타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와 지도 하에 일어났다.

수세(受洗) 직후 그가 시험받으려 하셨을 때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 세례받을 때의 성령 강림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성령에 이끌리어...광야로 가사" 시험받았다고 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광야"로(into)"라 말하는 데 반하여 누가는 특별히 광야"에서(in)"라 말하며 동사의 시상은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요 일정 기간을 표시하는 미완료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성령이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거기 머무신 동안 성령이 그와 함께하사 인도하고 시험에 승리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그것들이 다 끝나자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돌아가시니"(눅 4:14)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험받는 시초부터 끝까지 온 기간이 성령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예수의 인성이 자기 앞에 놓인 격심한 시험을 이길 힘을 받은 것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았다. 이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 신의 성질을 흡입시켜 그가 사탄의 시험과 모든 악의 세력을 저항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는 그 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악을 물리칠 수 있기 위하여 성령의 내주를 굳게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험 기간뿐 아니라 그의 전 사역의 모든 시험 전체에 성령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함이 완전할 것이다. 이 첫 시험이 있은 후 사단은 그를 다만 "얼마 동안"(눅 4:13)만 그를 떠났던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놀라운 성령은 그리스도의 잉태 시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역사하셨다. 히브리 9:14은 이를 말하여,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공은 예수의 외적 죽음 곧 그가 숨을 거둔 표면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그가 죽으신 내적 태도에 있다. 하나님은 항상 마음과 표면성 행위 간의 정당한 관계를 요구하신다. 그의 뜻에 겉으로만 순종함을 기뻐하시지 않고 반드시 영혼 안에 상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거나 겉만 깨끗한 그릇을 돌아보시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태도를 요구하신다. 만일 예수께서 마음에 없이 - 침울하게, 억지로, 극기심으로, 단순히 필요상 십자가에 나아가셨거나, 즐거이 온전하고 뜨거운 열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하셨던들 아무 속죄도 이뤄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나는 십자가를 지기 싫다. 원치 않으나 의무니까 해야겠다."고 하셨다면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아무런 의도 효용을 발휘치 못하였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구원에 필요한 수동적 및 능동적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예수께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렸다. 그는 그 결과를 알면서, 그러나 기꺼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과 신뢰와 복종으로 죽음에 나아갔다. 그의 태도는 온전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9:14에,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함과 같이, 이 모두는 성령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 완전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하신 분은 곧 성령이었다. 그분 없이는 예수께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완전한 태도로 십자가에 나아갔고 그로써 우리를 위한 구속을 이루셨다.

 

 

7. 그의 부활하심

 

성령의 역사는 예수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부활에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버지께 돌려지고(행 2:24), 때로는 아들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특별한 의미로 성령께 돌린다. 바울은 로마서 8:11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하였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하셨다는 것은 그의 일반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 곧 아담에게 생명을 주거나 오늘날 새 생명을 내거나 중생에서 신령한 생명을 허락하는 일들과 일치한다.

 

 

8. 그의 영화(榮化)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 성령의 마지막 행위는 어느 특정한 본문에서 증시(證示)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많은 곳에서 연역적(演繹的)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聖化)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가 모든 순결한 종교적 생명-무죄 상태의 아담 같은 생명들의 근원임을 추론한다. 구원받은 자 안에 영원히, 하늘에서까지 거하실 분이 성령이시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의 부활에까지 계속하신 성령께서 그가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듯, 또한 영화롭게 되신(榮化) 그의 인성 안에 거하실 것은 확실하다.

 

 

결론

 

결론으로 강조할 것 셋이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생애의 모든 면에 있어서 그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어도 인성으로서의 인간 되심을 그치고 사신 것이 아니다. 즉, 인성을 신성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성으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참 인성을 부인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육체(인성)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2, 3) - 편집자 주]. 오히려 예수께서는 항상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그 신성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불필요하게 하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서가 아니요 사람으로서 예수는 우리가 여러 번 본 것같이 성령이 필요하였다. 사람으로서 그는 탄생 시에 죄에서 지켜지기 위하여 그가 필요하였고, 청년 시엔 거룩함과 순종과지혜를 주실 분으로, 또 수세 시에는 메시야적 직임을 위해 그로 구비하기 위하여, 시험 시에는 악을 대적할 힘을 위하여, 죽음에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필요하였다. 그때마다 성경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도우셨다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음을 부인함은 곧 예수의 참 인간성에다 그 인성이 갖지도 아니한 신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 인성을 손상시킴이 된다.

 

둘째로, 무구(無垢)히 잉태되어 그 죄책이나 부패에 걸쳐 원죄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 예수께서도 성령을 의지하였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성령이 필요하랴! 우리는 신성과 연합되지 아니하였고,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악에 기울이고 있다. 예수의 행사와는 반대로 중생한 후에도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이로써 우리 안에 그의 임재를 손감(損減)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내주의 충만을 위하여 한층 더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예수께서 소년 시에 그에게 개인적인 거룩함과 지혜를 주사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실 성령이 필요하였다면 본질상 죄악적인 우리 어린 것들이 영적으로 아름답게 자라고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 가려면 얼마나 성령이 필요하랴! 만일 하나님이시요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성인(成人)으로서 그의 전도를 위하여 성령의 세례를 요했다면 오늘날 죄 있는 복음의 전도자들이 그들의 전도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기 위하여 그들의 생에 성령이 얼마나 더욱 필요하랴! 그리스도께서 그 시험 중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거늘, 우리가 우리 생명 안에 더 성령의 충만하심을 구하지 않고 어찌 죄에 대해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싫은 마음 없이 기꺼이 순종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으니, 우리가 무엇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즐거이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욱 성령이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항상 조심하여 지키면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그가 우리의 모범도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성령이 충만한 생애로써 거룩함과 죄에 대한 승리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우리 생에 적용시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구속 그 자체의 성취에서부터 그가 활동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할 수 없었다.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는 그의 잉태와 출생 시에, 그가 자라날 때, 그의 공직 사역에 임하여 세례받을 때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수태로부터 영화롭게 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성령께 구속의 공로를 중생과 성화로써 우리 생명 안에 적용하심을 인하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 자체를 이루심을 인하여도 찬송을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07-126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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