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흠도 없고....

최송연의 신앙칼럼 2009. 9. 3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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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 18-19절 말씀)”

신약 교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두 가지 의식(예식)이 있다. 그것은 첫째: 성만찬 의식(Communion Service), 둘째: 침례(세례)식이다. 침례식도 세례식도 각 교파에 따라 다른 것을 취하 듯, 성만찬 의식 역시 각 교파마다 다른 견해를 주장한다. 우리는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성령님께서 각자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는 은혜대로 선택하면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성만찬 예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할 때,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우리들 사이에 크게 나타나 아무런 오해도 없이 모두 깨닫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성만찬식(Communion Service)의 유례:
 
성만찬식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흘리신 피를 기념하며 그 피를 믿고 죄 씻음 받는 신앙고백 행위이며 유례는, 출12: 1- 30절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마지막 밤,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장자를 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과 그 무서운 재앙의 밤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 안에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다. 과연 그날 밤, 그 약속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은 머리 털 하나 상치 아니했지만, 그 말씀을 알지 못했거나 설사 안다고 하여도 믿지 않거나 순종치 않은 사람의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재앙의 천사가 지나갈 때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쳐서 죽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희생된 어린 양은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었고 오신 메시야는 그 예표 된 대로 십자가 위에서 찢기고 상하셨다. 아무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우리 마음속에 뿌리운 자는 더 이상 죽음이 왕 노릇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성만찬의 유례다.

1. 성만찬 식의 기원과 그 중요성:

성만찬 식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막 14:22-26, 눅 22: 14-20, 등)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떡과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 성찬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다. 그때부터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거행해 왔다. 성찬예식의 중요성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느냐,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느냐, 다시 말해, 사느냐 죽느냐의 중대사가 달렸다고 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 53-56절 말씀)”

2. 성만찬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특별 의미:

a. 속박으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 (Redemption, 눅 22:20절 참조.)
b.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쳬의식을 강조한다. (Unity, 고전 10: 16-17, 고전 12: 13절 참조.)
c.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 신앙이 내포되어 있다. ( Anticipation, 눅 22: 16- 18절 참조.)

3. 성만찬 예식(의식)에 따른 몇 교파의 견해 요약:

화체설 = 로마 캐톨릭: 성만찬식에 마시는 포도주와 먹는 떡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함

성체 공재설 = 루터 교회:떡과 포도주가 물질적인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은 아니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실제적 임한다고 함.

신비적 임재설 = 칼빈(칼뱅) 교회, 일부 감리교회 일부 장로교회의 견해 일부 장로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신비적으로 특별한 방법(특별한 은혜)로 임한다고 함.

칼빈의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기념적 행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means of grace)이었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론처럼 성만찬에서의 주님의 사실적 임재론을 피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다"고 피력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성만찬에 실제적으로(really), 그리고 전적으로(fully) 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을 행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영적 임재설로서 오늘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의 임재론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기념 혹은 상징설 = 침례교, 일부 장로교회: 단순히 기념하고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나 살이 마술적인 어떤 방법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함.

어떤 사람이 성만찬 (의식)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인가?

자격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때, 대단히 까다로운 것 같다. 고전 11: 23절에 보면 자격 없는 자가 분별없이 먹고 마셨기 때문에 그중에 많은 사람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이 말씀을 잘못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선행에다 그 기준을 두고 있음을 본다. 자기의 생활이 깨끗지 못한 사람들, 죄가 있는 사람들은 성찬 예식에 참예하지 말라고 권하는 목사님들도 계시고 또 그런 권면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이 깨끗지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히 성만찬 식에 참예할 자격이 없다하여, 스스로 성찬식을 거절하는 사례도 자주 보아 왔다. 잘못된 가르침이 주는 엄청난 오류라 하겠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자격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하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몸을 찢기고 상하신 것 또한 죄인을 위해서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 13절 말씀)”

필자가 어릴 때 길리움 받은 교단은 아주 엄격한 교단이었다. 우리 교회서는 성만찬 예식이 있기 전에 목사님께서 늘 광고를 하셨다. “곧 성만찬 예식이 있을 텐데 성만찬 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이 지켜 정결케 한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자기를 살펴 깨끗치 못한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던지, 아니면, 자기 앞에 잔이 올 때 그 잔을 받지 말도록 하라.”고 친절(?)한 안내까지 해 주셨다. 이것은 칼빈(칼뱅)주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칼빈(칼뱅)은 성찬식 준비 기간은 "각 사람이 성찬식을 가치 있게, 그리고 성찬식을 합당한 경건함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전 주일에 선포했다. 어린이들과 외부인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상당한 자기 검사와 자기 성찰 후에 성찬식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적 경건은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님의 조명하에 깨달은 말씀은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잔에 참예 하려면 “상당한 자기 검사와 성찰” 후에,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가 성만찬 식에 참예할 자격자가” 아니란 것이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의를 행했는가? 하는 것에 성찬식에 참예할 수 있고 없고의 기준을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가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주님의 피와 살이 필요하고 그 공로로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런 마음의 자세야말로 주님이 기뻐 흠향하시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속죄하는 능력이 우리 주님의 피와 살에 있음을 믿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은 주님의 피와 살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하는 결단의 마음으로 그 잔과 떡에 참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필자는 개혁 신학과 개혁 교회와 무관하지 않기에, 칼빈의 신학을 지지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꼭 같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성경은 성만찬 예식에 참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자기 성찰후 깨끗한 삶을 사는 의인이기에 참예한다는 의인 의식보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눈물로 그 앞에 나가는 용서 받은 죄인,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인 의식이어야 그 피와 잔을 기념하는 예식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의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광명한 하나님의 빛 앞에서 부끄러울 것 뿐, 주 앞에 내세울 수 없다. (욥 25: 4-6, 롬 3: 10-18, 23절 참조.)

2. 침례나 세례를 받은 성도이다.

각 교단별로 교리가 약간씩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자격을 세례교인 혹은 침례교인으로 한정 시키는 것은 모든 교회가 대부분 일치를 보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회중 앞에서 그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절 말씀)”

아무 흠도 없고 죄 하나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그 피를 의지하는 마음, 주님이 구주 되심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성도라면 자기의 부족함을 빌미로 성찬예식에 참예하기를 거부하기보다는 더욱 열심히 성찬예식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은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복된 성도가 될 것을 권하고 싶다.
 

뉴욕 아멘넷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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