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이 무슨 뜻이예요?
자료실 2009. 12. 1. 06:10▲승려사진 본인 사진입니다.
‘인연(因緣)'이란 단어도 불교의 윤회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거든요 그럼에도, 많은 성도, 심지어는 목회자와 사모님들조차 글을 쓸 때 인연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목사님께서 한 번 정리해 보아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1. 인연(因緣)의 어원
인연은 인도 범어 (hcnpratyaya)의 번역어로서 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 원인이 되는 '인(因 hctu)'과 주변에서 이를 돕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는 ‘연(緣 pratyaya)’을 말하고 있으며, 한자로는 인연(因緣)이란 인할 “인(因)”과 인연인 “연(緣)”으로서 뜻은 “인하다, 말미암다, 의지하다, 쌓이다. 인하다. 연분, 등의 어원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연은 인(因)과 연(緣)의 복합어 있고, 사전적 어원을 찾아보면 “사물들의 사이에 서로 맺어지는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불분하고 인연(因緣)은 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불교 창시자는 경전에 이르기를 ‘인(因)과 연(緣)을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佛性)를 보리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인연(因緣)의 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불교는 모든 존재의 현상 세계는 인연(因緣)이 모여 있을 때 존재하고, 인연(因緣)이 흩어지면 없어지기 때문에 현상세계를 바다위의 파도처럼 부질없는 것이요, 덧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연에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면 없어지기 때문에 나와 세상은 실아(自我)도 실상(無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없어지는 무상(無常)세계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실상(實狀) 있는 세계를 믿는 종교요, 나의 실존이 없는 무아(無我)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생이 있는 자아(自我)를 믿는 종교라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치는 인연(因緣)을 맺어지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500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겁(劫)의 한자적 의미는 오랜 시간이며, 화엄경에서는 1겁이 4억3천2백만 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오늘의 형편은, 과거에 지은 인연(因緣)으로 인한 것이요, 미래의 모습은 오늘 내가 택하는 인연(因緣)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아무생각 없이 쓰는 인연(因緣)이 불교의 모든 교리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2. 인연(因緣)의 의미
불교의 문화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어느 종교에 관계없이 한국인은 “또 인연(因緣)이 있으면 만나겠지요,”, “우리가 만난 것도 다 전생에 인연(因緣)이지요.”라고 아무생각 없이 말들 합니다. 즉 모든 만남을 인연(因緣)으로 돌리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인연(因緣)의 의미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처의 깨달음을 요약하여 설명한다면 연기(緣起)와 중도(中道)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연기(緣起)란 불교의 세계관으로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한 내용이 십이연기(十二緣起)론으로서 인간의 괴로운 생존이 열두 가지 요소의 순차적인 상관관계에 의한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무지(無知)한 무명(無明)을 근본 원인으로 하여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가 순차적으로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인간론으로서 윤회의 과정을 십이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회가 되면 불교(佛敎)의 인간론 90분 강의안 기고하겠습니다.
중도(中道)란 불교에서 거문고 줄을 끊어지지 않게 매고, 튕김 소리가 적당하게 나도록 매는 것을 뜻합니다. 줄을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안 나고 너무 단단히 매면 줄이 끊어지는 것과 같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밝힌 수행의 길로서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한국인들은 “당신과 나는 전생에 인연(因緣)이 있었나 봅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때 인연이란 전생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일과 나에게 했던 일을 의미합니다. 즉 당신과 나는 전생에 어떤 관계를 맺는 일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연기(緣起)사상입니다. 즉 연기사상은 인연(因緣)사상과 동일하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석가는 연기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법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연기법은 불교가 이 세상의 현상 세계의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교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창조론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누구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된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연기법 즉,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 데, 불교에서는 업(業), 번뇌(煩惱)라고 말합니다. 업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라고 불교에서는 봅니다. 즉, 인간은 마음의 작용에 따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業), 업보(業報), 업장(業障)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업(業)이 현상세계를 만든다는 연기법은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구원론 핵심은 심심불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불(佛)이 있으며 해탈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초파일 법문(法問)에서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라고 말씀도 심심불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요(렘17:9)”,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롬8:4-7)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의 차이점이라고 생각됩니다.
3.인연(因緣)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한국 대부분의 문화가 불교적(佛敎的)인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생활을 불교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고 있는 말들 중에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가 담겨져 있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인연(因緣)이란 말도 그 하나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인연(因緣)은 우연(偶然)이 없어 보이지요, 인연이 있으면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가 봅니다”라고 말들 합니다.
교회생활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떨쳐 버리는 것은 생활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고,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교회 단합을 강조 하고자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因緣)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교회에서 이 만남의 인연(因緣)은 우연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만남의 인연(因緣)입니다.”라고 한 인사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연(因緣)이란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인연(因緣)이란 글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불교(佛敎)의 기본 틀이 되는 교리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신앙 단합대회에서 사회를 인도하시는 장로님께서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의 만남입니다.”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에 전념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교회가 기고자에게 원하는 것은 불교는 “마귀(魔鬼)의 종교요”, “우상(偶像)의 종교요” 라는 것과 한국불교와 승려들의 타락된 모습을 폭로(暴露)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도들의 귀는 즐거울 수 있을지라도 혹 불자들이 왔었다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사생활이 기독교(基督敎) 교리가 될 수 없듯이, 승려의 사생활이 불교(佛敎)의 교리는 될 수가 없다고 기고자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직선적이고 비판적인 전도방법보다는 논리적(論理的)이고 이론적(理論的)인 교리를 비교론적인 전도(磚道)방법이 효과적(效果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 교리를 많이 알았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는 불교와의 만남이 불가피합니다. 이제는 불자들이 성도 집을 찾아와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시대 속에서 야기될 수 있는 종교 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이를 극복(종교 분쟁 없이)하고, 상호이해 속에서 전도는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불교의 사상에 이해가 있으면 전도대상자인 불자가 소승불교(小乘佛敎)를 믿는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믿는지, 무속불교(巫俗佛敎)를 믿는지, 보살계를 받은 불자가 인가를 아는 것이 불교권 전도전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지역의 사찰 수나 불자들이 사찰에서 드리는 예불의 의식을 아는 것도 전도에 많은 도움이 것입니다. 즉 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자들과 대화가 되면 그들이 적대시 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기고 글을 통해서 불교(佛敎)권 선교적인 전략 차원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인연(因緣)이란 주제 범위를 조금 넘은 점 이해를 바랍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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