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원래...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0. 5. 2. 14:07
“아침저녁 따뜻한 물에 한 숟가락씩 꿀과 함께 타서 마시고, 밥맛 없다고 굶지 말고 그럴 땐 매실 장아찌를 참기름 듬뿍 넣은 양념 고추장에 무치고 밥은 물에 말아서라도 자주 좀 떠 먹어 보도록 하렴, 젊은 사람의 얼굴색이 그래서야 어디 쓰겠느냐…?”
대문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어느새 준비해 둔 것인지, 무거워서 들고가기 싫다고 하는 나의 가방을 억지로 열고 손수 정성껏 담가 두었던 매실 장아찌와 매실 엑기스를 옷가지 사이에다 끼워 넣으며 언니는 사랑이 담뿍 담긴 고운 눈을 살짝 흘기듯 웃어 주십니다.
매실 장아찌, 비빔밥만큼이나 그리운 어머님의 또 다른 손맛입니다 …. 어릴 적, 내 고향 집 뒤뜰에는 어머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먼 산등성이엔 하얀 눈이 아직도 덮여 있는 이른 봄이면, 북풍한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운다고 해서 설중매(雪中梅)라 불리기도 하고,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견디어 낸다는 절개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 매화나무에 새하얀 꽃이 피기 시작해서 3월 중순이면 만개와 함께 세차게 불어 젖히는 시샘 꽃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낙화하기 시작합니다. 어스름 달빛에 하얀 꽃잎이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창가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사르르 아파오면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던 소녀적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매화꽃이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파릇파릇 돋아나는 잎사귀 사이로 어느 틈엔가 대추씨 같은 매실이 조롱조롱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월 중순∼7월 초순경이면 매실 과육이 단단하며 가장 질이 좋은 상품이라시며 해마다 그때쯤이면 청매(靑梅)를 따서 매실 장아찌를 담구시느라 어머니의 손길이 더욱 바빠지십니다.
잘 익은 청매(靑梅)를 흠집 없는 것으로 골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빼고 소금물에 폭 잠기도록 담가 하룻밤을 재운 후, 아침에 눈이 뜨이는 대로 소금물에 재어두었던 청매(靑梅)를 건져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 위에 고운 대를 깔고 쭉 늘어놓고 한 사나흘 동안, 이리저리 뒤적여 주며 바싹 말립니다. 화사한 여름 햇살에 꼬들거리며 잘 마른 매실을, 다시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 고추장 항아리에 쑥쑥 박아 약 한 달가량 익히면 맛도 좋고 건강에도 그만이라는 매실 장아찌가 숙성되는 것입니다.
잘 익은 매실 장아찌를 꺼내어 씨를 빼고 그릇에 담아 놓고, 거기다 고추장, 파, 마늘,설탕,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쳐서 상에 올려놓습니다. 매실 장아찌가 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그 새콤달콤한 맛이 얼마나 개운한지 나도 그날만은 내 앞에 놓여진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매화꽃이 피고 떨어지고 청매가 알알이 익어갈 즈음이면, 더욱 그리워지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고향 집은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는 듯했고, 뒤뜰의 매화나무도 벌써 잘리워졌다는 소식이 들린 후로 나는 고향집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선교사인 우리는 열악한 환경의 제 삼국을 이곳저곳 해매고 다니노라면, 마음은 보람되고 기쁘지만, 몸이 약한탓에 금세 지치고 허약해져 나는 때때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싸늘한 냉기마저 감도는 고향 집을 찾는 대신, 나는 서울에 계신 언니를 찾아갑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손맛을 쏙 빼닮은 언니가 집에서 열린 매실은 아닐지라도 제철이면 청매실 홍매실을 구해서 어머님처럼 장아찌도 담그고 매실 액기스도 만들어 두었다가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찾아가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면서, 조금이나마 어머님의 손맛을 느끼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어 주시는 언니의 극진한 사랑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란 말이 맞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침대 위에서 편히 누워 잠을 잔다고 하여도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신 적임과 동시에 정신 적인 존재이기에 정신 적으로 만족을 누려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쉬운 예로, 개나 소, 돼지 같은 짐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짐승들은 먹을 것만 주면 그릇이야 깨어졌든지 더럽든지 정성이 있든지 없든지 그런 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찌그러지고 깨어진 더러운 그릇에 먹을 것을 담아 발길로 툭! 차서 밀어주면 그저 만족하다고 꼬리를 흔들면서 좋아라 먹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먹을 것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하여도 인간 대접을 해주지 않거나 사랑이 없는 음식을 주면 아주 기분나빠 합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밥은 먹지않겠다, 고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정은 한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리라 (창 2: 27-28절 ).” 이 말씀은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자 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에덴 동산에 있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만물을 다스리는 삶, 바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게 되는 관계도 역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이라고 하는 보금자리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원래 가정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사는 내 가정이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내 이웃, 내 가정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이요, 인간이 원래 창조된 목적에 부응하는 길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진수입니다.
현대는 너무 많은 가정이 이유도 아닌 이유들로 깨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방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가정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데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흔히들 말하는 그런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감상적이며, 표면적인 감정의 유희는 더더욱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 헌신과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너를 위해 내가 소멸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정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줌 같이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엡 5:1-2절 참조.)
겨울 된서리, 폭풍 한설에도 꿋꿋한 절개로 견뎌내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햇살 가득한 오월이면, 청매(靑梅)가 알알이 영글어가듯, 환난 풍파 모진 된서리 쉬지 않고 몰아쳐도 꿋꿋한 절개를 지켜나가는 너와 나의 사랑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알알이 영글어 가는 축복을 받아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엡 5: 24-25, 요1서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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