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와 신자(信者)
자료실 2011. 3. 5. 04:08"군자(君子)"는 공자와 유가(儒家)의 이상적 인간형입니다. 논어의 첫 머리인 학이(學而)편에 군자의 길을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여기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적(知的) 배움이 아니라 인간적 배움을 말합니다. 즉 지적 배움을 통하여 인간이 되는 배움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학문보다는 인간됨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익히는” 것은 마치 새 새끼가 쉼 없이 날기 연습하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거운 과제라기보다는 즐거움이 따르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쁨은 혼자만이 누릴 것이 아닙니다. “은사(恩賜)는 곧 과제(課題)라”는 독일 속담처럼 그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또는 멀리서 모여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혼자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이 흘러넘칩니다(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러나 세상은 이런 순수함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늘같이 물량적인 가치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을 바보취급 하기가 일쑤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곧 무능한 사람으로 통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의 몰이해(沒理解)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군자라고 했습니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 이전(또는 그 이후)에 군자란 사회적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런 계급의 대칭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소인(小人)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그랬습니다. 돈 있고, 지위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군자연(君子然)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그것은 곧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였습니다. 군자가 특권계층이었듯이 백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했던 군자는 인격적으로 “된 사람”이었고 소인은 그와 반대로 인격적으로 “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용어였던 군자와 소인이 도덕적 인격적 전문 용어로 변화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득권 계층에 대한 폭탄선언이요 도전이었습니다.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信者)"는 누구입니까? 과연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떠합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즉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아멘”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이런 사람을 찾으셔서 그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들의 모임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έκκλεσία)”란 말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그 성격이 다른 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서는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고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어떤 인간적인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 그 기초가 됩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신자”가 사회적 용어로 타락하였습니다. 교회 직분은 이미 계급화 하였습니다. 중직자는 기득권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섬기기는커녕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 돈을 주고 벼슬을 샀듯이, 중세 가톨릭에서 성직매매가 성행하였듯이 돈과 자리 챙기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이제는 본래의 뜻과는 반대로 세상보다 더 추악하고 덜 개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던 우리 주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하면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집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사람은 기본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 이 땅에는 다시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아멘넷, 김오동 목사님 칼럼 글
먼저,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여기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적(知的) 배움이 아니라 인간적 배움을 말합니다. 즉 지적 배움을 통하여 인간이 되는 배움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학문보다는 인간됨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익히는” 것은 마치 새 새끼가 쉼 없이 날기 연습하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거운 과제라기보다는 즐거움이 따르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쁨은 혼자만이 누릴 것이 아닙니다. “은사(恩賜)는 곧 과제(課題)라”는 독일 속담처럼 그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또는 멀리서 모여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혼자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이 흘러넘칩니다(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러나 세상은 이런 순수함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늘같이 물량적인 가치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을 바보취급 하기가 일쑤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곧 무능한 사람으로 통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의 몰이해(沒理解)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군자라고 했습니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 이전(또는 그 이후)에 군자란 사회적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런 계급의 대칭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소인(小人)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그랬습니다. 돈 있고, 지위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군자연(君子然)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그것은 곧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였습니다. 군자가 특권계층이었듯이 백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했던 군자는 인격적으로 “된 사람”이었고 소인은 그와 반대로 인격적으로 “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용어였던 군자와 소인이 도덕적 인격적 전문 용어로 변화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득권 계층에 대한 폭탄선언이요 도전이었습니다.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信者)"는 누구입니까? 과연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떠합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즉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아멘”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이런 사람을 찾으셔서 그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들의 모임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έκκλεσία)”란 말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그 성격이 다른 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서는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고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어떤 인간적인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 그 기초가 됩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신자”가 사회적 용어로 타락하였습니다. 교회 직분은 이미 계급화 하였습니다. 중직자는 기득권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섬기기는커녕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 돈을 주고 벼슬을 샀듯이, 중세 가톨릭에서 성직매매가 성행하였듯이 돈과 자리 챙기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이제는 본래의 뜻과는 반대로 세상보다 더 추악하고 덜 개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던 우리 주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하면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집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사람은 기본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 이 땅에는 다시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아멘넷, 김오동 목사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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