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현재 기독교인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흘린 순교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전국 어디에나 순교의 피가 흐르지 않는 지역이 있겠습니까마는 전남 여수는 순교의 성지라 할 만큼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이기풍 목사, 손양원 목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죠.
고난 주간, 여수종교문제연구소장 신외식 목사(월전벧엘교회 담임)가 ‘여수기독교 순교역사’와 ‘여수 기독교회사’라는 두가지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미 오래전 집필을 끝낸 원고이지만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두 가지 원고 중 고난주간에 되짚어 볼 만한 여수기독교순교역사를 게재합니다. 신 목사의 글을 보며 순교의 피를 흘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을 반추해 보는 고난 주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편집자주> |
신외식 목사 / 여수종교문제연구소장, 월전벧엘교회 담임
머리말구국의 성지요 순교의 성지 아름다운 도시 여수. 500백 여 교회, 9만여 성도로 부흥 성장한 여수의 교회들과 그 이면에는 순교의 역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순교의 성지 여수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이기풍 목사, 손양원 목사, 정성균 목사의 순교는 여수의 복음화율이 왜 높은지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본론여수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일제 치하에서 이기풍 목사가 순교했고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으로 많은 기독인, 특히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동신이 순교했다. 6.25한국전쟁에 이르러서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한 열 분(손양원 목사/애양원교회, 조상학 목사/덕양교회, 지한영 전도사/율촌장천교회, 지준철 성도/지한영전도사 장남,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허상용 집사/돌산읍제일교회, 황도백 집사/우학리교회, 곽은진 성도/우학리교회, 안경수 성도/우학리교회, 백인수 성도/우학리교회)이 순교하셨다. 여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교의 역사와 기독교회의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는 도시다.
1. 여수 최초의 순교자 이기풍 목사(1865년 12월 23일~1942년 6월 20일)/ 제주도 선교사, 순교자, 평남 평양에서 출생
이기풍 목사는 1865년에 출생한 한국장로교회 초대목사 7명 중 한분이시다. 초대 한국장로교회의 목사이자 순교자이시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중일전쟁 후 S.A.마펫 선교사 등의 전도를 방해하고 핍박했으나 전도인 전군보(田君甫)의 전도로 결신(決信)을 하고, 1894년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1898년부터 매서인(賣書人) 자격으로 함경도 일대에서 성경 반포·전도사업을 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장로교단의 효시인 독로회(獨老會)가 조직되면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독노회는 그에게 남다른 선교열정이 있어 제주 전도에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1919년 광주북문내교회 초대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주선교에 늘 관심을 기울였으며 1920년 전라도 장로회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1942년에 소천했다.
이기풍 목사는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 안악, 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돌며 조사로 시무했다.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이 너무 심해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였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한다.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반대하여 제주도 민중들이 투쟁한 제주도 민중항쟁이다)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은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 위해 전도인 이관선·김홍련을 파송했다. 이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됐고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3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나덕환·김상두·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끝내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어 있다가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 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2. 여순사건의 순교자 손동인·손동신(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순교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집결해있던 군인들 중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여순사건이 발생한다. 반란군들에 의해서 여수와 순천은 무법천지가 되었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 죽이는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때 학교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를 비판하던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 동신 두 형제가 공산당들에게 색출되어 인민재판에 회부가 된다. 그리고 여수지역과 순천 지역의 수 많은 시민들이 학살되고 여수 순천에 많은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이때 잔인한 폭도들은 그 두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을 시킨다.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이 진압이 된 후에, 두 형제를 죽인 자들 중에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이 체포가 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을 때 손 목사는 안재선의 석방을 간절하게 간청한 후에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고, 그 후 안재선은 고려성경학교를 졸업하여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02사진: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인
3. 6.25로 인한 열 분 순교자 배출1)
손양원 목사의 순교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咸安)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 손양원 목사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동방요배’가 강요되는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항상 ‘동방요배’를 시작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손양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그러니까 15세 때 이러한 궁성예배는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손 목사는 1924년 1월 정양순씨(19세)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당시 감만동교회의 교인 600여명의 대부분은 한센병자들이었는데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나 보다.
손 목사님이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1935년 4월 5일의 일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지만 손 목사는 이 때 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것을 이유로 민족이 해방되기까지 6년간 옥고를 치르시게 된다.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후 손 목사는 가는 곳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결국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경찰서에서 나온 경찰들에게 연행되셨다. 그리고는 6년간 옥고를 치르셨는데 옥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손 목사로 인해 간수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인도되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애양원교회에 온 손양원 목사는 순교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센병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 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가셨다. 당시 한센병자들은 병이 다 치유된 이후에도 주변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되고 소외받던 사람들이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다니고, 차를 타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 극장,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센병자들은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손양원 목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6.25가 발발했을 때 피난을 가자는 교역자, 재직, 교인들의 간청을 마다하고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시면서 끝까지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시다가 마침내 1950년 9월 28일 저녁에 여수 근교 미평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여 순교하셨다. 그때 손 목사님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하셨다.
2)
순교자 조상학 목사* 1877년 전남 승주군 송광면 조형섭씨의 장남으로 출생
* 1899년 광주의 오웬(C.Owen) 선교사와 지원근 조사(현재 전도사)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
* 배유지(.E.Bel)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 1923년 43세로 평양신학교를 졸업
* 1930년대 초 율촌교회에서 목회중 1930년말 신사참배거부로 몇 차례 투옥
* 1950년 9월 28일 73세의 나이로 손양원목사와 함께 순교
3)
순교자 지한영 강도사* 1906년 5월 16일 여천군 율촌면 조화리 427번지에서 지재구씨의 3남으로 출생
* 여흥중학교졸업
* 평양숭실학교졸업
* 일본 신학교 수학중 反帝思想犯 (반제사상범)으로 투옥 학업중단
* 조선신학교 졸업(현 한국신학대학교)
* 여흥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시무
* 여수 덕충교회 전도사로 시무
* 순천시 승주교회(현 순천제일교회)전도사 시무
* 율촌면 장천교회 강도사로 시무중 6.25로 공산군에 체포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장남 지준철과 함께 순교
4)
순교자 윤형숙 전도사* 1898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에서 출생
* 윤치윤씨의 3남2녀중 장녀로 출생
*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 시위 중 한쪽팔과 눈을 실명
* 여수에서 봉산학원교원재직
* 여수제일교회 전도사 시무
* 여수중앙교회전도사로 시무중 8.15해방을 맞이함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
5)
순교자 허상용 집사* 1906년 여천군 돌산면 군내리(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서 허재홍 씨의 독자로 출생
* 돌산부면장역임
* 6.25을 맞아 교회를 지키다 공산당에 체포되어서 여수경찰서에 투옥
*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
6)
함께 순교하신 분들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애양원교회) 조상학 목사(덕양교회-현여수주향교회) 지한영 전도사(율촌장천교회) 지준철 성도(지한영전도사 장남)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허상용 집사(돌산읍제일교회) 황도백 집사(우학리교회) 곽은진 성도(우학리교회) 안경수 성도(우학리교회) 백인수 성도(우학리교회)등 10명의 기독인이 총살에 의해 순교하였다.
현재 여수시 둔덕동 순교지에 서현식 목사가 여수중앙교회 시무중 순교기념비를 제막하였다.
4. 정성균선교사정성균 선교사는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기 전인 1944년 5월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 속한 거금도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아주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 그는 정식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여수중앙교회에서 시행하던 성경 야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믿음과 성실성을 갸륵하게 여긴 성도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는 장차 목사가 될 꿈을 안고 한남대학교 성문학과에 진학하였다. 물론 대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지만 여러 성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등록을 할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렵게 대학을 다녔지만 그의 일기 어디에서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든지 권력을 추구하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주여! 부족한 인간이지만 선교사가 되게 하여 주시며 복음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의 정신을 본받아 나도 밑에 들어가서 섬겨야 하겠다”(1964. 4. 5.).
그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공주군 반포면 마암리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는 농촌과 섬 마을을 찾아가서 봉사와 전도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늘 가난한 섬마을 출신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면서 항상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친 다음 그는 무작정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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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전의 정선균 선교사(가장 우측)와 가족들 |
정성균 선교사는 1974년 7월부터 방글라데시(74.7~79.7.7)에서 4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바타라초등학교를 설립하였으나 모슬렘 교도를 개종시켰다는 이유로 방글라데시의 재입국을 거절당하였다가 1980년 10월 13일에 파키스탄선교사로 파송받고 꾸즈란왈다신학교에서 교수활동 중에 14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 교육, 봉사활동을 하였다. 자신의 생명은 돌보지도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국 땅의 뭇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시다가 1984년 7월 17일에 파키스탄에서 순교했다.
결론여수는 순교의 성지이지만 통일교와 신천지 등 많은 이단사이비가 침투하여 교회와 여수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 먼저 깨어있어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알고 새롭게 신앙을 다지는 귀한 계기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참고자료] *『여수중앙교회50년사』(여수중앙교회50년사 편찬위원회, 1996) *『여수노회 20년사』(예장통합여수노회20년사 편찬위원회, 2001) * 여수노회 순교자기념위원회 자료 (예장통합여수노회 순교자기념위원회) * 여수종교문제연구소 수집자료
참고사항 1) 손양원목사 1902. 6 .3..-1950. 9. 28. 호 는 산돌. 경남 함안(咸安) 출생. 1910년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7년 선교사 맹호은(孟晧恩)에게 세례. 1923년 일본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9년 경남성경학교(慶南聖經學校)를 졸업, 1934년까지 밀양·울산·부산 등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다시 신학을 지망,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小鹿島)의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교회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2) 정성균선교사 (1944.5.1.~1984. 7. 17.) 여수중앙교회(예장통합) 출신1944. 5. 1. 전라남도 고흥에서 출생 1967. 12. 22. 대전한남대학교 성문학과 졸업1974. 2. 22. 장로회신학대학 졸업1974. 7. 방글라데시 선교의 뜻을 품고 출발1975. 10. 27. 방글라데시 선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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