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

은혜의 단비 2011. 10. 6. 01:55

거룩한 분노

어떤 분이
“목사님! 삼가 청을 드리나이다. 언제 ‘거룩한 분노’에 대하여 목사님의 은혜로운 글을 접하고 싶습니다. 말씀과 더불어 그 것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발하거나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거룩한 분노” 즉 의분(義憤)에 관하여 제 생각을 올립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불의(不義)를 보면 의분을 느껴야 합니다.
만약 불의 보고도 아무른 느낌이 없다면 이는 죽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불의 보고 일어나는 의분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하느냐? 라는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쌍방 당사자 서로가 상대방에게 의분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교인들의 싸움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닙니다. (실제는 감정싸움인데도 명분은 의분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싸움은 순교적 투쟁이 되는 것 입니다. 이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야 어떻게 되던, 하나님의 어린 양들이야 상처를 받든 말든 순교할 각오로 극한투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나는 많은 교회에 부흥회를 다니면서 분쟁하는 교회가 너무 많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편 말을 들어보면 상대편에 대한 의분이 일어납니다. 반대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찬가지로 의분이 일어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물론 어떤 사람의 죄상이 명백하게 객관적으로 들어나고 이론의 여지가 없을 때는 교회에서 법대로 치리(治理)를 하면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성경은 “죄인은 의분을 낼 자격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부자가 가난한 독거노인의 한 마리뿐인 양을 뺐어. 잡아서 손님 대접을 했다는 말을 듣고 다윗왕은 의분이 나서 노발대발 했습니다. 이것은 의분이 아닙니다. 다윗의 죄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우리아를 죽게 한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큰 죄인이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노하는 것은 의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죄 많은 여인에게 의분이 나서 돌로 치려는 무리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의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자기 죄는 보지 않고 형제의 허물만 보고 분노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고 "외식(外飾)" 입니다.
따라서 자기 죄를 먼저 회개하고 용서 받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18:23-36) 거룩한 분노와는 거리가 멉니다.

둘째 서로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의분을 느낄 때는 자기가 분명이 옳다고 생각되면 내가  십자가를 저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는 바리새인입니다.(눅18:9-14)
예수님은 유대인의 악행을 보고 유대인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이 아니고(예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고 의분(신성모독: 그 때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으로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저주를 받아 유리방황하며 600만 명이 나치스의 가스실에서 연기로 사라지는 비극의 주인공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진실로 의분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십자가를 저야합니다. 그리하면 놀라운 일이 버러집니다. 주님 곁에 앉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사라나고, 성도들은 마음의 상처가 치료를 받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21C 인간상(핵 시대의 인간상)을 3가지로 정의 했습니다.
(1) 내 향성 (2) 아버지 상실 (3) 강박성 나우웬의 예언은 21C에 와서 적중 했습니다.
특히 (2) 아버지 상실이란 권위가 상실된 시대란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목회 현장에서 “거룩한 분노”를 행사한다는 것은 (3)강박성 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됩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의 사람으로서의 지도자”를 주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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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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