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울이 이해한 죽음                              이미지 전체보기




한글로 번역된 "죽음" 혹은 "사망"과 관련된 어휘는 로마서에서 한 가지 어휘가 아닌 여러 어휘들이며 그것들은 로마서의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것들은

"qana/toj"와 관련된 것들, "nekro/j"와 관련된 것들, "a)poqnh/skw"와 관련된 것들이다.

로마서에서 "qana/toj"와 관련된 것은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1) 죄의 결과로서 인류에게 나타난 죽음의 실재와 또한 심판으로서의 죽음 (1:32; 5:14; 6:23). 2) 전혀 죄와 상관없이 의의 행위로 생명의 왕국을 이끌어 들인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게 된 사실을 말한다 (5:10, 12; 6:3, 4, 5). 3) 이 사망은 인간 세계에 왕 노릇 한다 (5:14). 그리고 죄가 왕 노릇 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한다 (5:21).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왕 노릇할 수 없고 (6:9)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4) 율법과 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 (7:4). 5) 어떤 행위에 기인하여 생명의 영향력이 없는 상태 (7:10; 13, 8:6).

로마서에서 사용된 "nekro/j"는 8:10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4:17, 7: 8과 8:10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은 자들"로 번역되는 형용사적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죽은 자"가 나올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은 자"로부터의 다시 살아남 혹은 사람들의 "산 자"와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죽은 자"로 번역된 것들 중 6:13절, 11:15절, 그리고 14: 9절만이 예수의 부활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로 번역된 모든 것들은 실질적으로 목숨을 가진 존재가 인체의 모든 기능과 활동이 중단되는 존재의 끝인 목숨의 끊어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복수형의 의미는 모든 사람 각자가 가야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길임을 말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죽음을 필연적인 숙명의 길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지어 그 깊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던가 (5:8), 그의 죽음과 연합한 신자들이 새 생명 안의 삶을 가능케 한다던가 (6:4), 아니면,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한다던가 (7:4)이다. 즉 죽음은 새 생명의 영역의 삶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외에 4:17절은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비유적으로 생명을 생산할 수 없는 인체의 상태를 말하는데 쓰이고 있다.

반면 6:11; 7:8; 8:10절들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6: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는 말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태도를 설정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즉 죄의 욕구에 전혀 응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간주하라는 것이다. 다음 7:8절은 법은 죄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법을 통하지 않고는 죄는 전혀 그 구속력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8:10절은 유기체적 자아와 몸은 죄 때문에 죽음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 구절들을 통하여 비록 죄 때문에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죄와 법의 구속력에서 벗어난 삶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a)poqnh/skw"라는 동사형은 그리스도가 실질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거나 (5:6, 7, 8; 6:8, 9 10; 8:34; 14:9) 아니면 많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5:15)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자들의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였기에 (6:4)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며 (6:2) 그리기에 죄가 더 이상 그들을 주관할 수 없다고 말한다 (6:14). 왜냐하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통해 신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에 거기서부터 벗어나서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7:3). 그러므로 신자들은 몸의 행실 즉 육신의 소욕을 따르게 하는 자아의 행위들에 대하여 굴복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한다 (8:13).


4. 바울이 이해한 생명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생명 혹은 삶과 관련된 어휘는 명사형 zwh/의 여러 변형과 za/w의 여러 가지 변형된 동사 형태들이다. 그는 로마서에서 zwh/의 형태들을 단 한번도 모든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생명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사용한 어휘들을 살펴보면, 이 생명은 죽음이 지배하는 아담의 후손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신적인 생명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5:10에서 "그의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이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이 7:10절이다. 여기에서 율법은 원래는 생명으로 이끌어 (ei)j zwh\n) 드리는 역할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불가능하였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서 생명은 인간의 속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생명의 성령 (tou= pneu/matoj th=j zwh=j, 8:2)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신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비록 인간의 자력으로는 이 생명에 도달할 수 없지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인한 칭의의 결과로서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다 (5:18). 이것은 전적으로 의를 기초로 한 은혜의 지배에 의한 결과다 (5:21).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림으로 (6:4) 확증된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한 생명이고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다 (5:21; 6:23). 이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으로 앞으로 올 새 시대에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선물이다 (2:7).

의롭게 된 사람들이 이 생명과 관련해서 현재적으로 취해야 할 원리들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종말론적으로 완전하게 누릴 이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삶의 궁극적 목표를 썩지 아니할 생명과, 영광과, 존귀를 추구하는 데 두며 참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2:7). 둘째,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의를 기초로 해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므로 (5:17) 의의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6:4). 셋째, 이 생명과 직결된 성령의 법이 신자들 안에 역사 함으로 (8:2)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해방 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생각을 따라가야 한다 (8:6a). 왜냐하면 바로 성령의 생각이 생명이고 순종을 통해 그 생명의 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8:6b).

이상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원리들로부터 파생되는 의의 삶을 위한 몇 가지의 실천적인 권면은 z\wh/의 동사형인 za/w의 여려 형태와 관련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서에서 산다는 표현은 첫째, 목숨이 끊어짐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게 되는 죽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목숨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위한 활동을 가능케 하는 삶을 말한다 (14:7-9). 둘째, 의롭게 된 사람이 의의 기초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1:17) 전체 양상을 말한다. 셋째, 죄의 종으로서의 살아가는 양태를 말한다 (6:2; 6:17). 넷째, 부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산 것 같이 (6:10) 하나님을 향한 의롭게 된 사람의 삶을 말한다 (6:11).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뜻한다 (6:8). 다섯째, 육신의 소욕 혹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가는 행위를 뜻한다 (8:12). 여섯째, 율법 하에 있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의 기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10:5). 일곱째, 죄가 계명으로 인해 그 구속력을 활성화 내지는 계명이 없을 때 비록 죄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구속력과 상관없이 즉 죄의식 없이 사는 인간의 삶을 뜻한다 (7:9; cf. 5:13).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의롭다함 받은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1) 율법의 의에 따라 행할 수 없으며, 2) 육신의 요구에 따라서 행할 수 없으며, 3) 죄의 지배에 굴복하지 말고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1)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자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2)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면서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3)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야 하며, 4) 궁극적 삶의 목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두고 자신의 전체를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5) 그러한 헌신의 삶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거기에 속한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데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5. 결론

이상에서 로마서에 나타난 몸, 죽음, 생명에 대하여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개념들을 말하고 있는 대부분의 언급들이 몇 개의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로마서 5장에서 12장 사이에 특히 5~8장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부를 이루고 있는 부분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개념은 바울의 복음의 내용의 중심부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의 구조와 관련해서 볼 때 바울의 복음의 내용은 권면 부에 해당하는 12장 이하의 권면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몸과 생명에 관한 권면 역시 그 이전의 내용들의 이 권면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로마서에 반영된 바울이 이해한 몸은 단순한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죄의 몸 사망의 몸 즉 죄의 지배하에 있어서 마침내는 사망으로 가는 신체와 자아가 유기체적으로 연합한 인간 총체성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죄로부터 해방을 받기 전에는 서로 서로 작용하여 더러움 중에 살며, 불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 함 받은 후에도 아직 죄의 영향을 받아 전인적으로 정욕에 이끌리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그러기에 죄의 정욕으로 인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며, 또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하나의 몸이며 각자 각자는 그에 속한 지체로서 유기체적인 연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반영된 죽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각기 다른 헬라어 어휘 속에 들어 나는데 여기에서는 목숨의 끊어짐과 같은 개념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롭다함 받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지만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부활하게 되었다. 바로 그 죽음과 연합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죄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으로 이끄는 몸의 행실을 제어하며, 불의의 병기로 지체를 드리지 않을 때 진정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반영된 생명에 대하여 바울은 한 번도 모든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생명으로써 생명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영생과 관련된 신적인 생명 그리고 의롭게 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 누릴 특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 특권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에 기초해서 바울은 윤리적 혹은 종교적 권면을 제시하고 있다. 소극적으로 육신, 죄에 굴복하지 말 것이며, 율법의 의에 따라 살지 말 것이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되 공동체의 유익과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일에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같은 이해와 권면은 다양성과 갈등의 양상을 띠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유대인이든지 아니면 헬라인이든지 상관없이 죄와 율법과 육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게 사망의 몸, 죄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있다는 연대성이 들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성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며는 결국은 사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만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점에서도 같은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한 몸의 지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다양성이 있지만 연대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라는 연대적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끝으로 이러한 이해를 통해 한국 교회에게 주는 윤리적 적용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이 제시한 복음의 핵심에 근거하여, 교회의 궁극적 존재의미를 정립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나 죽으나 하나님만을 위하여"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각자 각자의 헌신과 함께 다른 교회는 한 몸의 지체들임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 중에도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연대성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된 한 몸임을 발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림으로 이미 하나가 된 것을 역사적으로 실현하는 연대적 사명이 달성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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