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반영된 몸, 죽음, 생명에 관한 바울의 이해 (평택대학교 홍성국 교수)


서론                                                                     이미지 전체보기



"몸, 죽음,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신약적 접근은 복음서에서 반영되고 있는 논제들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아니면, 바울서신 혹은 다른 서신들의 것들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에 한정하여 위의 주제에 대한 그의 이해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한 발견이 어떻게 오늘의 기독교의 윤리적 관심에 일조 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찾으려는데 있다.

빅터 퍼니쉬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의 바울의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들에 대하여 일괄한 후에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는 바울의 윤리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바울의 윤리적 문제는 바울의 "설교의 전체" 즉 그의 신학적 "전제와 자각" (presuppositions and convictions)의 문제와 결정적으로 그리고 중심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논문은 먼저 몸, 생명, 죽음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에 대하여 탐구하고 그 후에 그것이 로마의 성도들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러한 탐구를 통한 발견을 통해서 오늘의 기독교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면을 제안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로마서와 로마의 성도들의 상황적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밝힌바와 같이 로마서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고, 바울도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가운데 이 편지를 썼다고 인정할 때, 그 상황과 관련된 바울의 의도를 정확히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선행될 때 현대적 적용의 가능한 면을 분별할 수 있는 유익도 있다.


1. 로마서의 상황

로마서의 수신인은 로마에 있는 모든 성도들 (1:7)로 되어 있다. 이 성도들은 크게 두 민족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은 바울의 논지가 두 부류를 대상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과, 16장에서 안부를 묻는 대상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는 사실에 의해서 입증된다. 그런데 이들 로마의 성도들은 단일한 예배 처소의 교회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정 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가정 교회로 구성된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울이 이 서신에서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월터즈에 따르면 로마 교회는 A. 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축출당한 후 로마의 이방 교인들은 유대적인 삶의 영향에서 점차적으로 분리하게 되었고, 그들이 54년 이후에 귀환한 뒤에는 유대인들의 삶에서 자유하려는 이방 교인들과 율법을 준수하며 살려는 이방 교인들의 갈등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로마의 기독교회 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통합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의 내적 증거를 살펴 볼 때,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의도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몇 차례 로마를 방문하기를 원했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3-14; 15:22). 그는 이미 일우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사역할 곳이 없으므로 서버나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울은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15:24). 그러나 그러한 소원은 로마에 여러 가정 교회 형태로 흩어져 있으며 하나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갈등을 가지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5:5). 바울이 이러한 분리 상태에 있는 로마의 성도들을 로마서로 통해 하나로 연합시키는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신학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측면이고,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사명에 대한 측면이다. 첫째, 신학적 측면은 로마서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들 편에서의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비판에 대하여 바로 잡아 줌으로 바울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15:7에서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할 때, 사용된 proslamba/nesqe는 그것은 마음의 갈등 없이 서로 서로를 같은 기독교 공동체내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어원적인 뜻은 15:8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을 받아들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유에서 보강된다. 이렇듯 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복음 안에서 하나로 연합시키는 측면에서 복음의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윤리적 측면은 신학적 전제에 근거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세우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14: 19-20절은 화평에 대하여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그리고 식물 때문에 하나남의 사역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때문에 바울은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사랑은 서로 판단하지 않고, 부딪힐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는 것이며,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는 것 그것이 연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것 모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바울의 전도 사명의 측면은 바울이 지금까지 전한 복음은 자신이 임의로 지어 만든 내용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인데 바울은 그것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1:1).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선지자들의 글 속에 있는 비밀이며 계시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16:26). 바로 그 복음을 전함으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이방인들 사이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15:18).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그리고 앞으로 전할 복음은 바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이고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된다 (15:16).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쓴 로마서에 나타난 몸, 생명, 죽음의 문제를 이제 하나 하나씩 분석해 보자.


2. 바울이 이해한 몸

먼저 로마서에서 몸으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어는 단수 인 sw=ma의 여러 격과 (4:19; 6:6, 12; 7:4, 24; 8:10, 13, 23; 12:4, 5) 그것의 복수형인 sw/mata (1:24; 8:11; 12:1)가 합하여 13회 나온다. 위의 각 구절들을 종합하여 분석해 보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몸은 단순히 뼈와 살과 피와 신경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체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4:19에서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 위에서 말한 신체적 기능의 무력함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기능에 대한 무력함이지 사람의 신체 자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완전한 무력함을 들어내며 오직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믿음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6:6절에서의 무 (Moo)에 따르면 "죄의 몸" 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죄의 유기체 (organism of sin)이고; 둘째는 죄를 저지르기 쉬운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는 신체를 뜻하며; 세 번째는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인격 (the person dominated by sin) 을 뜻한다. 그러나 무는 바울은 이 소마를 "세상과의 접촉의 수단으로써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온 모리스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나타나는 결과로써 "죄의 몸이 멸하여"라는 본문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이 소마는 "죄의 충동에 쉽게 반응하는 신체"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서로 상반된 주장에 대하여 "죄의 몸이 멸하여"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는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소마는 신체와 자아를 분리하여 그 의미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양자를 유기체적으로 생각하여 그 뜻이 찾아져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인적인 자아와 신체가 유기체적으로 연합하여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음 6:12절 (비교, 8:13)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고 한다.

여기서 문법적으로는 "너희 죽을 몸 안에 있는 죄"로 번역할 수 있기에 몸이 죄의 자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시 문법적으로 "죄가 너희 죽을 몸 안에서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이 같은 문법적 해석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몸이 죄의 근원이라고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전자의 해석보다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할 것이다. 머레이는 이 죽을 몸을 "해체될 신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순종의 주체를 너희라고 함으로 6절에서처럼 여기에서도 해체될 신체지만 이 몸은 독립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유기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도 아직 죄의 영향을 받아 전인적으로 정욕에 이끌리어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8:13절의 몸의 행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

여기에서 사망의 몸에 대하여도 역시 머레이는 신체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던은 아직도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몸도 위의 구절들과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는 탄식 속에서 나라는 자아가 사망의 몸과 필연적으로 유기체적인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율법 하에 있는 사람이 율법적인 노력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죄를 자극하여 그 가운데 빠지게 되고 죽음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몸은 바로 그처럼 율법적인 노력을 하려는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이 몸은 그러한 기능을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자아와 유기체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율법적 노력에 빠져 들 수 있다는 것이다.

8:10에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여기서 "몸"은, 무에 따르면, 협의적으로 신체를 말하며, "죽은 것"은 신체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던은 6:6절과 7:24절에서처럼 죄의 지배 하에 있는 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이 어휘는 독립적으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파생된 실질적 신체적 죽음은 물론 자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그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력함을 포함한 총체적인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도 역시 몸의 죽음은 신체와 자아의 유기체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2:4, 5 복수 1:24; 8:11; 12:1

8:23에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라" .

이 부분에 대하여 머레이는 "하나님이 아들들이 멸망치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옷 입을 때의 부활"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무는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소유격이 목적적 소유격이라는 관점에서 "구속받은 몸"에 대한 것이고, "우리의 몸들은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특징인 좌절에 동참한다"고만 말하고 있다. 던은 6:6절과 7:24절의 그 몸과 큰 차이가 없이 부패의 대상이 되며, 몸의 행실로 나타나는 이 시대 속에서의 삶의 양태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 될 것 곧" (ui(oqesi/an)이라는 동격의 의미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 아들이라는 의미는 자아와 몸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한 인격체를 말한다. 그런데 8:14-16절에서 이미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15절에서 23절의 "양자"와 같은 헬라어 원어가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23절에서의 종말론적 완성으로써의 양자됨을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적 양자됨이 신자들의 몸이 죄와 죽음과 정욕의 지배에 아직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몸의 구속은 전혀 그러한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아와 몸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상태로의 변화를 뜻한다.

12:4, 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몸의 뜻은 개인을 전체 안에 연합시키는 유기체로써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에 대해 데니는 "개인이 상실되는 연합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독립적인 전체이며 동시에 서로의 지체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각자와 모두는 오직 서로 안에서 존재한다"고 아주 명료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상에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소마"의 단수형의 여러 양태를 살펴보았다. 한 개인의 공동체와의 유기체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 마지막 12:4, 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자아의 신체와의 유기체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한가지 반드시 집고 넘어 가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마의 단수 형의 사용은 어떤 공동체의 각 지체에게 진실 된 것은 공동체 전체에도 진실한 그 무엇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라는 점이다. 즉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는 로마의 성도들 각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전체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다음 소마에 대한 복수형의 사용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복수형은 롬 1:24; 8:11; 12: 1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하나 하나에 대하여 생각해 봄으로 소마의 복수형 속에 나타난 의미를 이해하려고 한다.

1:24.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소유격 부정사의 용법은 목적을 나타내기도 하며, 또는 연속적인 결과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의 용법은 어느 하나의 용법이라기보다 불분명하지만 이중적 용법을 다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면으로는 자신들의 정욕에 의한 결과로 이어지는 몸의 불명예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배척이 자신들의 정욕을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게끔 결과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불명예는 신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신체적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체가 그러한 행위를 하게 한 동인은 하나님을 배척한 자의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고 그러한 자의적인 결정은 마음의 욕망에 이끌리어 갈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몸의 불명예는 역시 자아와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의 복수의 의미는 8:11절과 12:1과 같은 맥락에서 "저희들 각 사람" 혹은 "당신들 각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몸을 불 명예롭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든, 아니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모든 행위는 결국 각 사람의 자아의 결정적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 된다.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여기서 그들의 몸은 불 명예롭게 하였든 이전의 몸과 (1:24) 다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몸으로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며 명령형은 그러한 가능성을 가진 성도들 각자 각자의 자아가 자신의 신체를 그렇게 드려야 함을 뜻한다. 이 말 속에는 성도들이 자신의 신체를 그렇게 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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