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내면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급진적인 외부세계의 발달(물질문명의 발달)과 정신적성숙의 부조화로 겪고 있는 인간들은 내면적 궁핍과 갈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혼란과 혼돈의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하여 새로운 탈바꿈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오늘날의 뉴에이지 운동이 형성되기 이르른다. 그러나 이 운동이전에 이미 서구에서는 당시 문화와 가치관의 틀을 형성해 주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으로서 무신론 주의가 등장했고, 내면세계의 풍요와 성숙을 꾀하는 심리학을 통한 인본주의적인 내면운동이 일어났다.



II.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

헤겔은 말하기를 "니체는 이미 죽은 하나님을 축하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어 있다"라고 니체는 그의 책 「Joyful Wisdom」에서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가장 타락된 개념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모순되며 삶을 변화시켜 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 신의 죽음은 문화적 사실로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는 문화적 인식은 곧 인간해방으로서의 경험을 의미했다. 이와같이 니체에 관한한 신의 죽음은 인간해방의 징표였다. 사실 신의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고, 문화적 포로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자 하나님은 죽었다. 너 고상한 인간들아 이 하나님은 가장 위엄한 존재이다. 그가 무덤에 누워있기에 당신은 다시 부활한다."라고 니체는 외쳤다.

니체는 1900년 죽었다. 그러나 "신의 죽음"의 주제는 미국 신학자 William Hamilton 과 Thomas Altizer에 의해서 다시 부활 되었다. 그 때가 바로 1960년대이다. 시사 주간지 Time지는 1966년 부활절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사실 Hamilton 과 Altizer는 신의 죽음의 운동은 이미 1961년에 Gabriel Vahanian에 의해서 "신의 죽음(The Death of God)"이라는 저서가 출판되면서 시작 되었다. Vahanian은 그 후 1978년 "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부언했다. 말하자면 이전 세대의 기독교와 후기 기독교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출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설명이었다. 해밀톤과 알타이저는 바하니안 이상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사실이었다. 그들이 전해주고 하는 메시지는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개념의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회복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복음이란 분명히 구원적인 행동으로서 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신의 죽음의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로빈슨은 1963년에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기독교적인 신의 비평의 상당부분은 인습적인 신론(conventional theism)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과연 신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습적인 종교(교회)안에 갇혀진 신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사실 인습적인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비평은 로빈슨 이전의 1956년 Alasdair MacIntyre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무엇이 신학적인 혁명인가?에 대한 답을 하면서, 하나님은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세상적인 해방에 관련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한시적인 세상이라는 객관적인 구조 안에 계시는 실체라고 주장했다.

사실 신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의 부재나 계속성에 대한 의문제기였다. 19세기 말기로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철학이나 신학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그 실체는 인간의 상실감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상실감과 일치하고 있다. 좌절감 상실감 속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신의 죽음이란 신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신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죽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잠재울 수 있는 전능한 실체이기 때문이다(실존적 비관주의). 이것 역시 당시 팽배하고 있는 인습론적인 하나님, 혹은 이신론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추적인 산물이었다. 신의 죽음을 말한다면 "어떤 신이 죽었느냐"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입증한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서구의 인습론적인 유일신론을 의미한다.

1907년 프로이드(Freud)는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라는 저서를 발간하면서 프로이드는 종교를 근본적으로 병리적이고, 혼란된 상태, 그리고 보편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신경증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의 모델로 보았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우주적으로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미성숙의 형태이며, 어린 시절 성적인 욕구가 성숙한 어른의 상태로 탈바꿈하는데 실패한 결과로 보고 있다.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라는 저서의 제 5 장은 단순히 신앙의 심리적인 원인들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허위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프로이드가 언급하는 "종교의 비진리성"에 대한 가정은 심리적인 분석에 의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인습적인 이성주의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문화적 종교에 대한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나, 그의 작품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프로이드는 당시의 믿음과 신앙적 실천이 상당히 신경증적이고 혼란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

인습적인 종교의 눈으로 보기에는 믿음과 의혹은 마치 무신론자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했다. Justin Martyr는 자기 스타일로 만들어진 신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무신론이라는 타이틀을 환영했다. 하나님의 세계는 끊임없이 경험되어지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하나님이다. 성서적인 믿음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경험 가운데에서 알려지는 하나님이시다. 경험없는 하나님은 지적인 추상의 하나님으로 남는다. 불트만은 그의 저서 「Jesus and the Word」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건의 최종적인 원인이라는 사상으로 그 의미를 보충 하려고 한다면, 그가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사변에 불과하다. 이 믿음에 아무리 굳게 달라붙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믿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결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문화적인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세대들은 모순적인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매우 실용적인 듯하지만 내면에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다. 이성적이면서 초이성적인 세계(신비의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미 서구사회에서 겪었던 몸살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와 가장 유사한 구조와 현상을 지닌 사회가 미국이다. 그 만큼 그 사회가 이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면 보다 적합한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가 겪고 있던 뉴에이지 운동은 대강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III. 뉴에이지 운동

뉴에이지 운동이란 특정한 이념을 중심으로 한 어떤 공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어떤 특정한 노선이나 선언문 같은 것도 없다. 단지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발전되어 온 하나의 시대적 정신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정치적인 운동, 내면적이고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운동, 해묵은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서 전적으로 내면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정신적 잠재개발운동 내지 문화적 운동, 건강을 하나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연의 조화라는 차원에서 보는 건강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시대정신이 실천적으로 반영된 하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그 특지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반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60년대 미국은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고 회의케 하는 사조들과 사건들이 많이 터져 나왔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문화는 지극히 사변적이었고 지성주의적이었다. 계몽주의를 방불하는 냉랭한 영적 분위기에 젊은이들은 기성적인 권위와 문화에 대항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반문화적인 운동은 60-7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비트족과 히피(Hippie)족들은 틀에 박힌 생기없는 물질문명과 기술문명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객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관에 더 이상에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관적인 신비의 세계로의 탐닉을 시도하였다. 이 반문화 운동은 환각제와 비교(occult)를 주관적인 신비의 경험의 매개체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심리학자 Timothy Leary,(1920 --)나 철학자 알란 와츠(Allen Watts, 1915-1973), 시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 --)등이 LSD와 같은 환각제 등을 신비적인 내면세계의 체험 내지 종교체험의 정당한 매개체로 인정해 주는데 기여한 인물들이다. 특히 그것을 신앙운동의 틀안에서 적극적으로 LSD를 사용했던 사람은 Timothy Leary 였다. 그는 LSD 사용을 종교적 순례요 성례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종교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경험의 결과인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일산화 질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마음의 본질과 의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 이렇게 역사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는 약물과 의식의 관계가 1967년 LSD (Lysergic Acid Diethylamide)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약물을 통한 하나님의 추구는 결국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에 대해서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약물의 문화로부터 그 약물의 경험을 뛰어 넘는 새로운 영성운동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이며 하나님 추구 역시 개인적인 일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리고 음악이 그들의 세계를 대변해 주었다. 질서잡힌 사고를 할 수 없을 만큼 고출력 앰프를 사용하여 귀가 찌어질 듯한 소음 섞인 밴드와 현란한 조명으로 그들의 심리를 광랑케 하는 록 음악이 출현했다. 또한 강력하고 자극적인 음향효과를 통해 환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이키델리 록 (Psychedelic Rock)이 나타났다. 이 음악은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불만과 분노를 담아내었고 동시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꿈을 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1967년 6월에 사흘간 계속된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열린 "몬테레이 페스티벌"이나 1969년 8월 16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우드스탁(Woodstock)의 록 페스티발은 청년 문화를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도덕적 의무에 매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은 당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현실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며, 기독교가 배경이 된 미국의 주류문화나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새 세대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향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2. 뉴에이지 운동은 혼합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이고 종교다원적이다.

뉴에이지 운동이란 반문화적이면서 종교적인 성격을 깊게 띄고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종교들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각기 다른 표현양식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이다. 그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신이며, 자아이다. 小我는 凡我로 확장되며, 그 범아에서 모든 소아는 일체가 된다. 소아는 범아로부터의 분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종교를 인정하나 배타적인 종교의 배타성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각 종교로부터 필요한 만큼 흡수하여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했던 영지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절대적인 초월자에 대한 귀의보다는 내면 안에 있는 신, 각 개체에 존재하는 신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사명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신의 속성을 분여받았다. 표현양식이 다를 뿐이다. 이 신은 비인격적인 힘이거나 거대한 우주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힌두교나 기타 동양의 신비종교가 그들의 이러한 입장에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3. 깨달음을 강조한다.

요즈음 서양인들은 유대교 및 기독교의 틀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을 동양신비종교에서의 "깨달음"으로 그 유형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동양 전통에 눈을 돌리면서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와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들을 위해 무언가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찾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회가 종교의 참된 영적 측면을 상실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직적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개인적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믿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양의 형이상학과 "새 의식 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것들이 기술주의를 앞세우는 서양정신의 압제적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대체세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양 사상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서양의 합리주의, 물질주의, 상업주의 문화를 비난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대안적 사상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들은 서양 교회가 영성적이고 선지자적 역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동안 생겨난 공백을 메워주는 사람들로 자처하고 있다.



4. 인본주의적이며 낙관주의를 지향한다.

인간이 무엇인냐? 스펭글러는 이렇게 주장한다. "내가 하나님인가? 내가 그리스도인가? 내가 무한대(the Infinite)가 부풀어 나는 곳으로부터 당신에게 오는 존재(a Being)인가?...나는 이 모든 것들이요, 그 이상이다." 즉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영적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전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요 과제는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우주 자체가 영적인 실체여서 인간의 삶이 우주의 힘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각성함으로서 보다 고차원적인 의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 개인적인 자아와 현상적인 자아를 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는 고자아(The Higher Self)가 있다. 이 고자아는 초인격적인 자아로서 신비스러운 수준에서 다른 자아들과 일체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여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 잠재력은 여러 가지 교육기법에 의해서 일깨워질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환경을 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자기 성취와 자기 실현이 인생의 당연한 목표이다. 인간이 처한 모든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능력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5. 체계적인 탈바꿈을 추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요가나 선이나 마인드 콘트롤, 초월명상 등을 수련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련방법은 명상이다. "신지학 협회"(The Theosophical Society)의 창설자인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는 "명상은 침묵이며 말로 하지 않는 기도이며 플라톤이 표현한 대로 신을 향한 영혼의 열렬한 전환이다. 이는 틀별한 선(good)이 아닌 선, 그 자체 곧 우주적인 지고선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명상을 통하여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뉴에이지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라즈니쉬도 "명상을 통해 무한(infinite)으로 될 것이며 그리고 우주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전체(the whole)와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뉴에이지 운동에 관련된 이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자아를 우주적인 의식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자아의 가장 내면에 이르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가장 완전하고 심오한 실재(reality)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이다.

개인적 재통일(분리된 자아의 재통일, 분리된 자아는 하나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내적 재연결, 자아의 잃어버린 부분들의 재결합을 이루고 나면 훨씬 더 큰 대자아와 연결되는데, 여기서 마틴 부버의 말대로 "나와 너"의 결합과 영적인 융합이 이루어진다. 무관심하게 여겨졌던 형이상학적인 친구들이 이웃과 가족처럼 느껴진다. 가장 기묘한 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탈바꿈"이다. 자아에 대한 두려움,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는다. 예를 들자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끊임없는 실험과 배움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탈바꿈된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대자아에 이르렀다는 증거이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린다.



장로회산학대학 유재룡 교수의 칼럼 중 일부임

 

참고서적

David Spangler, Revelation: The Birth of a New Age (San Francisco: Rainbow Bridge, 1976).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1988).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Theology as Spirituality (New York: Harper & Row, 1985).

Marilyn Ferguson, 『뉴에이지 혁명』(The Aquarian Conspiracy) (서울: 정신세계사, 1994).

Morton T. Kelsey. The Other Side of Silence: A Guide to Christian Medita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76.

William James,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61).


* 본 논문은 장로회신학대학의 유해룡 교수님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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