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
 
'복음'이라는 말이 오늘날은 심하게 잘못 쓰이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인간 중심적 용어로 복음을 다시 정의내리려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는 대신 인간의 필요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에 관한 메시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의라는 낱말과 그 파생어는 로마서에 적어도 35번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메시지의 출발점이며 주제이다.
죄 짓는 인간들이 거부하는 하나님의 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셨다.
이 의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개하는 복음의 요점이다.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 함축 의미가 있다.
첫번째 뜻으로, 하나님의 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증오를 말한다.
1500년대 초,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블랙 수도원에서 이 구절을 읽고 앉아 있었다. 훗날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내 마음에 천둥 번개와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되었다는 말을 읽었을 때 온 마음으로 바울을 미워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영생을 가로막는 난공불락의 방해물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자신의 죄악됨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 죄악된 상태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받아 주심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17절에는 의(義)의 두번째 함축 의미가 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말한다.
이 의는 믿는 죄인의 것으로 전가된다(롬 4:24).
마침내 루터가 의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이 뜻을 이해했을 때, 그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그 발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이 교리는 칭의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이 신자의 원장의 자산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든 완전한 의를 공짜로 넣어 주시고 부채 부분에 있는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보실 때, 그 사람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온전히 의로운 것처럼 보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4:5).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그 메시지가 복된 소식인 이유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한다. 그러나 복음이 모두 복된 소식은 아니다. 사실상 그리스도로부터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전혀 복된 소식이 아니다.
바울의 복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그런 후에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체계적으로 입증하는 데 꼬박 2장 이상을 할애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현대의 복음 제시에서 거의 완전히 빠져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거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
오늘날 전형적인 복음 제시는 바울의 출발점과 정반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고 썼다.
그러나 현대 복음 전도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는 말로 시작된다. 이용자에게 친절한 운동의 문헌을 읽어 보라. 그러면 적극적인 어조로 모든 메시지를 담는 데 열중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한 목사는 이렇게 쓴다.
교인이 아닌 (베이비) 붐 세대들이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흠 있다고 하고 심지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지라도, 공적인 자리에 앉아 자신들을 벌레 같은 인간과 불운한 사람과 타락한 피조물과 전적으로 타락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베이붐 세대들의 목사로서 나는 그들이 소극적인 메시지라도 적극적인 용어로 제시된 것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는 사물들을 걸러내는 격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극적인 말을 할 수 없다면, 심지어 부정적인 시사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적극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베이비 붐 세대들은 아마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쓰는 어조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나는 일부러 내가 내 연령 집단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항상 적극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최근의 교회 성장 서적에 나오는 이런 논평은 거의 언제나,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말을 담는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없다. 위에서 인용된 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는 성경의 전제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 분명 우리는 타락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우리를 고귀하게 보셨다는 것을 역시 보여 준다."
 
그는 이어서 이 세대에 효과적으로 사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을 '낙관적'으로 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다시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하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며, 또 베이비 붐 세대가 습관적으로 소극적인 진리에 고개를 돌린다고 하는 그 저자의 근거 없는
일반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분명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소극적인 것을 회개할 동기로 받아들여야 하고 사실 그렇게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물론 두 문장 모두 옳다. 하지만 복음은 두 측면이 다 있어야 완전하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바울의 이런 출발점 즉, 인간의 필요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종종 빠뜨린다.
앞의 어느 장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진리와 적극적인 것만 전하는 복음 제시를 종합할 길은 없다.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진리를 '낙관적' 어조로 선포할 길은 없다.
그 결과 이들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라는 현실이 제거되곤 한다.
그리고 가장 고의적으로 비난을 해대는 곳은 바울이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영원히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로마서 1장과 누가복음 16장과 히브리서의 모든 경고 구절과 구약 핵심 진리 가운데 상당 부분과 예수님의 말씀 절반을 포함하여 성경의 결정적인 부분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가혹하고 언제나 소극적이고 압제적이고 우울한 설교를 선호한다는 인상을 갖지 말라. 물론 나는 그런 설교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지적했듯이,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을 성경적으로 균형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전략은 복음이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이 되도록 구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경적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라는 위협을 첫째 요점으로 살폈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라는 두려운 현실과 인간의 타락이라는 절망적인 가증스러운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주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런 주제를 끌어들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데 결정적인 핵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 의로운 분노가 없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시 45:7).
더욱이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완전하고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신다. 후자가 없이는 전자가 완전히 공허하다. 종종 진노와 자비라는 쌍둥이 강조점은 병행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구절은 좀더 친숙한 말인 요한복음 3:16과 같은 장에 나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한지 깨닫지 않고서는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멸망치 않고'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의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다. 신약과 구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한다.
시편 7:11, 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다'는 구절은 구약에 거듭 나온다(예. 삿 2:14, 20; 3:8; 10:7; 삼하 6:7; 24:1; 왕하 13:3; 시 106:40).

신약도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예. 롬 2:5; 3:5; 9:22; 엡 5:6; 골 3:6; 계 14:10).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참고. 신 4:24; 9:3).
이런 진리들이 우리로 안락하다거나 자신만만하게 느끼도록 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진리들은 호된 두려움과 무서움을 우리에게 가득 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복음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무서움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올바로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19:23).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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