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신앙

       네번째로 살펴볼 것이 구원받은 자의 신앙, 구원의 실증으로서 신앙입니다. 즉 ‘구원의 신앙’입니다. 구원은 믿음을 대가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 단번에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성도에게 믿음이 심긴 것입니다. 오랫동안 씨름해서 조금씩 얻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어둠에 있다가 빛으로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회의, 방황,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던 상태에 있다가 “아, 그렇다!”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오는 경계는 분명합니다. “혹시 그런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그런 것 같다.” 이런 건 결국은 아닌 것입니다. 아닌 부류 가운데 짙은 것이 있고 옅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뒤집어져 가지고 전연 딴 세계에서 있는 사람이 돼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나셨다. 이것은 요지부동한 사실이다. 안 그렇다면 큰일 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이 유다서 1장 3절에 있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상 쓰는 ‘믿음의 씨(semen fidei)’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게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오는 문제, 하나님 나라의 여러 경륜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크신 약속이나 하나님의 크신 경영에 대해 차례차례 깨닫고 “아, 그렇습니다.” 하고 자꾸 더 믿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믿음의 씨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이 아직 구원받기에 부족한데도 그것이 들어가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어떤 시기가 지나니까 비로소 형체를 온전히 이뤄서 그 사람에게 구원의 사실이 발생했다는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산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서 산 사람이 되니까 산 자의 의식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도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금방 깨달아 가지고 다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 제일 먼저 받고 확신하는 중요한 도리들이 있습니다. 막 믿고 온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에커너미(economy)를 건설하셨다.”고 말을 해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참으로 죽음에서 다시 산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산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신께서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어떤 말씀이 그에게 들어가서 역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복음이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자연인이라면 누구나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할 만한 생명의 활동이 아니고 인간의 생명 활동일 뿐입니다. 그런 인간의 생명 활동 가운데에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면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 그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서 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되자마자 그에게 들어간 그 말씀을 진리라고 믿고 받게 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언제 새로운 생명을 받았는가는 아무도 단정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도리, 복음의 기초를 처음으로 그게 이야기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새 생명을 받았다고 단언을 못 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의식이 없는 사람도 못 알아듣고 어린 아기들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 없는 사람은 다 구원받을 수 없다. 어린 아기들은 그런 까닭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건지고자 하는 자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거기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했습니다. 정상적인 의식이 있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가 그것을 거부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언젠가 구원하셨겠지.”라고 못 합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그런 태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무슨 의미한 것이라도 끄집어내다가 “아마 구원을 하셨겠지. 하나님께서 아마 천당으로 보내셨겠지.” 하고 말하기 쉬운데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은 복음이 전달될 때 그 복음에 의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은 특수한 경우뿐입니다. 이런 아기들이나 완전히 폐인이 돼 그것을 이해할 아무런 의식 작용을 못하는 사람들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다 절대로 구원 못 받았다.”고 단정은 않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 의식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항거를 했다면 일생을 그렇게 마쳤다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가 사람답게 의식 활동을 할 때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항거를 했으면 항거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의식 활동이 없는 동안에 나님께서 갑자기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고 장담을 하거나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멸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하나님 사랑의 거룩한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김홍전 [구원의 신앙] (서울:성약출판사, 1999) 95쪽~98쪽.
개혁주의마을/사계(四季)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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