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1.1. 연구 동기와 목적

롤란드 베인턴(Roland H. Bainton)은 "18세기 말에 기독교를 건진 것은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신생(新生)의 기적이었다"고 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과 각성운동은 종교개혁 후에 쇠락해 가는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부흥운동의 중심에는 '중생(重生)'의 복음이 있었다. 이 논문은 미국 대각성운동의 중심에서 사역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신학 중 특히 중생의 복음의 성격이 어떠하였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각성의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지금 미국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일어난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또한, 에드워즈는 19세기 선교확장 시기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은 미국의 우리나라 선교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2차에 걸친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미국에서 해외 선교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여파로 우리나라에까지 미국의 선교사들이 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주로 미국의 청교도적인 배경을 가진 복음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방 안에는 청교도 신학자들인 존 오웬(John Owen),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 존 번연(John Bunya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조나단 에드워즈, 존 플레블(John Flavel)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 장로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 네비우스(John Nevius)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 다음으로 실천적인 종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성도의 안식》(Saint Rest), 필립 도드리지(Phillip Doddridge)의《영혼의 일어남과 회심 과정》그리고 존 플레블의 작품들을 중요시한다"라고 했다. 이런 면을 놓고 볼 때 에드워즈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다. 페리 밀러(Perry Miller)가《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49)란 책에서 에드워즈를 계몽주의의 천재로 묘사한 이후에 에드워즈가 계몽주의의 천재인가 아니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칼빈주의자인가 하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드워즈의 구원론이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유사한지, 종교개혁 신학에 속하는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 왔다. 하지만, 그의 영적 내면의 기본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중생론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상당히 미미한 실정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왜 그러한 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려면 무엇보다 그의 중생론의 특징을 분명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1차 대각성운동이라는 교회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특별히 그의 중생론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연구 동기이자 목적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에드워즈를 개략적으로 종교개혁 신학의 입장에 서 있는 신학자라는 정도로만 말하고, 적극적으로 에드워즈가 종교개혁 신학 내에서 신학적으로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에 대한 연구, 특히 칼빈, 웨슬리의 신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한 것은 별로 없었다. 에드워즈의 사상을 나머지 두 사람의 신학사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에드워즈 중생론의 특징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 또 하나의 본 논문의 목적이다.

II. 에드워즈 중생론의 역사적 배경

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회 교부들은 '세례에 의한 중생'을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토대로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외적인 세례의 행위와 내적인 중생의 행위 모두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와 중생을 너무나 긴밀히 연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중생'을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가 중생의 일상적이고 공식적인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6)은《고린도전서에 대한 세 번째 설교》(Third Homily On First Corinthians)에서는 "세례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갈라디아서 주석》(Commentary on Galatians)에서 그는 세례가 우리를 중생케 하고, 씻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물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아마도 고대 교회에서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을 것이다. 그는 세례가 구원에 필수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세례와 중생을 밀접하게 결부시켰다.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 즉, 중생의 씻음(Washing of Regeneration)과 성화의 말씀에 의하여 중생한 자의 모든 병들이 깨끗하게 되고 고침을 받는다 ; 이것은 다음과 같다. 즉, 지금 있는 모든 죄들이 세례 때에 사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인하여 후에 범하게 되는 모든 죄까지도 사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례 때에 하나님께서 내주하는 성령의 선물을 주시고 죄의 빚, 즉 모든 죄를 도말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세례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신앙에서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들은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74)는 사효론(ex opere operato)을 주장하였다. 즉, 세례 받는 자는 중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받는다. 그것은 영적인 중생(spiritual regeneration)이다; 그러나 견신례를 통하여 사람은 영적인 삶의 완전한 성숙을 받는다." 아퀴나스에게서 성례들은 은혜의 도구적 원인들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다. 세례, 견신례, 성찬, 고해, 종부성사는 죄인들이 교회에 가입하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는 수단들이다. 토마스의 체계는 중세 말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은 말씀과 신앙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물세례와 중생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말하면서도 세례의 필수성을 가르쳤다. 루터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 자체가 이 약속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아는 가운데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깨어서 지켜야 한다." 그러나 루터는 세례 받을 때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례를 받을 때 신앙이 존재하지 않거나 생기지 않는다면 그 세례 의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루터를 계승한 루터교에서는 세례에 의한 은혜의 주입을 강조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은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로 우리가 받는 두 가지 은혜 중에 둘째 은혜를 중생이라 부른다. 칼빈은 세례의 효력과 본질 중 하나로 중생을 말한다. 칼빈은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되며,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루터주의자, 칼빈주의자, 영국 국교도의 세례의 의식에서 인상적인 것은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는 있으나 그들 모두 세례와 중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비하여 재세례파운동은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따라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신자의 세례, 즉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단순히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한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성례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했다.

트렌트 공의회(1545-63)의 선언에 나타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생론은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이다. 즉 세례 받는 자는 중생한다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 7차 회기 성례에 관한 부분에서 우리는 사효론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을 보게 된다. "만일 누가 새로운 율법[세례, 성찬]인 성례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은혜가 행해지는 행동을 통해서(ex opere operato) 수여되지 아니하고, 신적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은혜를 얻기에 족하다고 말하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세례는 원죄를 제거하는 데 필수적이다.

물세례와 중생을 연관시키는 전통이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와서 가톨릭은 물론이고, 재세례교도들을 제외한 종교개혁가들에게서도 그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칼빈 이후에 발전한 개혁신학에 와서는 중생의 개념이 물세례와 관련된다기보다는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과 관련된 용어로 주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청교도들은 '회심' 혹은 '중생', '신생'이라는 단어를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는 기술적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이것은 에드워즈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Ⅲ. 중생과 성령의 주입

3.1. 중생의 정의 : 성령의 부으심으로서의 중생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중생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은혜[성령]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작용에 의하여 주입되고(infused),"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산출하셔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은혜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중생이다. 에드워즈에게서 중생은 칭의 앞에 온다. 성령의 주입은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에서 가장 먼저 오며 그 결과 성령은 내주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생명의 원리, 그리고 지각과 행동의 원리가 되신다. 이 때 인간은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에게서 효과적 부르심, 회심(conversion), 회개(repentance), 중생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원죄》에 나오는 중요한 진술을 보면 회개, 회심, 중생이 같은 말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본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이다(중생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이다).

에드워즈는 마음이 회심에서는 능동적이고, 중생에서는 수동적이라고 말했다.

3.2. 에드워즈에게서 중생과 성화의 동일성과 구별성

에드워즈는 때때로 초기 성령의 주입될 때 일어나는 사건을 '중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하기도 하였다. 즉, 혼용하여 사용하였다.《삼위일체론》(Discourse on the Trinity)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거주하시면서 생명을 주는 원리로 활동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이 된다; 그리고 사람이 중생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그들에게 부으신다. 그래서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를 가지게 되고, 같은 말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좋은 것, 그들의 사랑, 기쁨, 아름다움의 참여자가 된다.……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제자들 속에 거주하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말할 때에 일반적으로는 중생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회심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생명을 다시 찾게 하신다. 회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성화 가운데 회복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영광 중에 회복을 완전케 하시는 것이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일의 시작이다. 그리고 성화가 있다.

3.3. 성령의 내주: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도들의 마음은 중생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 그리고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perception)과 행동(action)에 새로운 원리(principle)"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an indwelling vital principle)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령은 그 자신을 성도들의 마음과 연합하시고, 성도를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삶과 행동의 새롭고 초자연적인 원리로서 성도를 움직이시고 영향을 주신다. 성령은 성도의 영혼 속에서 활동하며, 거기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 속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전달하신다. 성령은 자신을 신자들과 연합하고, 그들 안에 살며, 그들의 기능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본성을 작용하심으로써,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향력과 영적인 작용들 속에서 역사하실 때, 그 자신을 독특하게 전달하시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받는 사람은 "영적이다"라고 말해진다.

3.4. 성령의 주입과 조명

에드워즈가 주입과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 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 ― 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이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죄인들에게 화해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는 길을 깨닫게 하는 것은 회심 때에 성령께서 마음속에 비추어 주시는 "천상의 신적인 빛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 속에 처음 들어오시고, 거기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실 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작용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의에 대한 깨달음의 즉각적 효과들은 무엇인가? 영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영접의 길의 실재와 적합함과 그 영광을 깨닫게 되면, '마음(heart)'과 '성향(inclination)'이 전적으로 그것을 포옹하게 된다. 전 영혼이 그것에 동의하고 따르게 된다. 모든 지배적이던 반대는 중지된다. 전에 대적하던 마음은 이제는 굴복한다. 마음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성향(inclination)'과 '애정(affection)'을 갖고 전적으로 그것에 다가가며, 그것에 붙어 있게 된다. 마음은 그것에 순순히 따르게 된다. 영혼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구원하는,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이 존재한다.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는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 새로운 의지, 성향
(신적인 기질) 행동의 원리 새로운 행동

Ⅳ. 중생 체험의 성질과 중생의 표지

4.1.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중생 체험의 성질만을 놓고 볼 때 에드워즈는 칼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웨슬리와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에드워즈 연구가들이 잘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다. 에드워즈 구원론의 정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중생 체험의 성질을 살펴보면,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중생과 회심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며", "에드워즈와 웨슬리 사이에 견인에서뿐만 아니라 중생의 본질에 있어 분명히(clearly) 심각한 차이(serious difference)가 있다"고 한 머레이(Iain Murray)의 주장은 상당히 잘못된 것으로 확인된다.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순간 경험적' 중생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와 영적으로 교통했던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도 그의 사역 기간 내내 경험적 회심의 개념을 주장하는 데 결코 그 긴박성을 잃지 않았다. "중생"이라는 그의 설교에서 윗필드는 성령으로부터 "신생"(new-birth)을 "경험적으로"(experimentally) 받는 것에 대해서 회중 가운데서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중생 혹은 신생의 교리는 신앙고백자들의 대다수 가운데 그토록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그토록 작은 수만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에드워즈도 경험적 중생 체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를 위시한 친부흥주의자들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었다. 그 회심의 경험은 "한번 영혼을 흔드는 체험이었는데, 확신이 오면 해방감을 주고 감정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이 없는 목사가 구원에 관해 영혼들을 지도하는 것을 아주 불행한 일로 보았다. 그는 체험이 없고 "불경건한 목사들만큼 지옥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중생 체험의 성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 :

에드워즈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이다"라고 말한다.
② 총체적 중생 :

에드워즈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이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한다.
③ 즉시적 중생 :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성경이 회심을 '창조 사역'에 비유한다는 사실도 회심이 즉각적인 역사임을 확증해 준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마찬가지로, 중생에서도 어떤 일이 무에서부터 즉시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중생 때에, 어떤 것이 즉시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온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며,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즉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들며, 이전의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4.2. 중생 체험의 성질에서 칼빈, 웨슬리, 에드워즈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한 사람과 회심치 못한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중생 체험에서 에드워즈와 칼빈을 비교해 보면 중생의 신적 기원을 말함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중생의 총체성과 즉시성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은 중생에서 우리의 '전부'가 변화된다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고 그 대신에 중생의 불완전성을 많이 언급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중생은 '전부가 즉시에' 변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칼빈에게서 중생은 우리의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칼빈은 요한일서 3장 5절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하루 동안이나, 혹은 순식간에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계속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지상(地上) 감옥인 육체를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거룩한 삶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하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에드워즈와 비교해 보면, 칼빈은 중생의 '총체성'과 '즉시성'을 말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와 에드워즈는 중생 체험의 성질에 대한 견해에서 동일함을 볼 수 있다. 즉, 두 사람 모두 다 신생(新生)의 위대함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중생의 정의와 신생의 경험에 대한 묘사에서는 일치한다. 웨슬리는 신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생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꿔지는 변화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의 본질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4.3. 중생의 표지에서 칼빈, 웨슬리,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중생한 사람의 표지로 범죄치 않는 삶을 산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3장 9절의 말씀을 현재 중생한 자의 표징으로 강하게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회심은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으로 거룩하고 은혜로운 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 실제로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

성경은 참으로 거룩하고 은혜로운 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 실제로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 일서 3장 9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씨는 사악함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즉,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생의 표지에서 에드워즈와 칼빈은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성도는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요한일서 3장 8절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간적으로 중생시키는가, 아니면 중생이 우리 안에 시작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옛 사람의 잔재가 우리 안에 남아 있게 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만일 중생(重生)이 아직도 충분하게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그 자체의 한계 안에서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은 것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많은 허물과 죄 아래서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옛 본성의 잔재들을 그들 속에 계속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의 욕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중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들이 죄를 이기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강조의 세기에서는 에드워즈나 웨슬리에 미치지 못한다.

웨슬리는 에드워즈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 육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강력히 말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으며"(요일 3:6), "육을 따라 살지 않는다."(롬 8:4) 그들은 밤낮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만을 하려고 애를 쓴다. 성 요한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요일 3:9)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씨, 곧 충실하고 신성한 신앙이 그의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는 요일 3:9절의 말씀을 중생한 성도의 현재의 모습으로 즐겨 인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웨슬리는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저들은 죄 가운데서 더 살 수는 없다(롬 6:12)." 웨슬리는 "사도 요한의 교리나 신약성서의 전체적 취지(tenor)와 일치하게 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범죄치 않는다고 말한 점에서는 에드워즈와 웨슬리가 같다. 칼빈은 이 점에서는 웨슬리나 에드워즈만큼 강조하지 않았다.

로마서 7장의 해석에서도, 칼빈과 에드워즈, 웨슬리와는 차이가 난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로마서 7장의 상태가 중생치 못한 상태라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경건치 않은 사람, 또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을 자연인(거듭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사도 유다는 성도들 가운데 가만히 기어 들어온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유 1:4) 언급하고, 이어서 이렇게 지적한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 1:19).……사도는 여기서 '육신에 속한'이라는 말을 부패하고 거룩함을 입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로마서 7장 25절에서 8장 13절,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6절, 골로새서 2장 18절이 그 점을 풍성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아래서 번민하는 사람을 중생한 성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그러한 영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온다."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은 영혼의 주요한 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웨슬리는 "노비의 영과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라는 설교에서 인간을 세 종류 즉, 자연적 인간,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은혜 아래 있는 인간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웨슬리는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으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곧 중생한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때[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때]는 가엾은 노예의 속박이 끝나고 그가 그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롬 6:14) 되는 때이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은혜 혹은 호의를 발견하고 그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 혹은 능력이 지배하는 사람의 상태이다.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은 것이다. "그 영에 의하여", 그는 이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롬 8:15).

웨슬리에 의하면, 은혜 아래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죄의 책임과 죄의 힘이 다 끝난다. 그는 이미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롬 6:6). 이상과 같이 웨슬리의 중생한 자의 묘사는 에드워즈와 일치한다. 중생 체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변화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두 사람은 지치지 않았다.


Ⅴ. 결 론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아 칼빈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물려받았으나 그의 신학의 핵심이 되는 중생의 개념에서는 칼빈을 닮았다기보다는 독일 경건주의, 혹은 영국 웨슬리와 윗필드의 복음주의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에드워즈의 중생의 정의는 칼빈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특히 중생 체험의 즉각성과 전체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의 내용적 깊이에서 칼빈과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개념에서 에드워즈의 견해와 칼빈의 견해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중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데서는 칼빈과 같고, 신비적 체험과 표현에서는 어거스틴과 비슷하고, 중생 체험의 깊이에 대한 강조는 웨슬리와 같다. 이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크게 보면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중생 체험의 성질 면에 있어서는 칼빈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웨슬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설교를 보면, 청교도주의와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 장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는 설교를 하였고, 그 후에 활동한 김익두 목사는 "성령을 받으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체험적 성령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교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 받기 전에는 살았다고도 믿었다고도 하지 말라"고 설교하였다. 1921년에 경남 창원군 웅천읍 교회에서 이 설교를 듣고 주기철이 회개하였다. 기타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 볼 때,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회심 설교가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유사했던 점이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왔다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된 영적 각성이 요청되는 이 시대에 에드워즈의 중생론과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중생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출처 :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61호 / 노병기(연세대)/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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