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신학 9

이근호 목사


그래서 그는 창조자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하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창조자의 자유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질서도 없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누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심리학적인 신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극복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의지가 없는 지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지성이 있다면 당연히 의지도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이 의지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차선으로는 다른 본질의 현존에 대한 긍정인데, 이것은 자신의 긍정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에서 나온다. 신적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신적인 지성과 연결된다는 교리가 형성됨으로써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을 기독교화 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이 신개념을 확정시켜서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표상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착상을 심각하게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지성과 의지가 구별됨으로써 그 지성과 의지의 전체 작용이 어떤 종류인가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서 모든 유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신인동형동성설로 각인되었다.


이 유보는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위탁되었다는 표상을 유비적으로만 가르쳤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실증적인 진술을 유비적 술어로 가르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의 입장에 가깝다.


이런 사상적 각인은 숙명적으로 다음 시대로 이어졌다. 왜냐玖� 이런 진술이 신인동형동성설적인 투사의 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만 보면, 라틴 스콜라 철학의 심리학적 신론은 무신론의 비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혼란스런 신관을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스피노자에게서부터 포이에르바하에 이르는 일련의 근대 정신에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지고의 누스를 현존적 세계에서 부동의 운동자 기능에 한정시킴으로써 세계의 영원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의 현존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주장을 전제하게 되었다.


또한 그 세계의 진료나 개체 형태의 무상성이 손상받지 않는 채 유지되는 그 형상이 요소들도 역시 이런 전제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세계 개념이라는 측면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독교 창조 신앙을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개인은 처음부터 철학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이 이 개인을 보편으로 나아가가는 매개 안에서만 ,즉 보편 개념이나 보편 규칙의 경우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한계 안에 있는 고전주의적 헬라철학은 보편적인 것과 전형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의 목표를 구체적인 것이라 할 개체에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개인을 보편의 매개로 생각하면 결국 전형적인 것을 개인보다 상위에 놓게 된다. 개인의 아종(亞種)이 발견될 때까지 개인을 보편 개념의 세분화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본질 개념으로서 유(類)개념에서는 소용이 없다.


한 유나 혹은 같은 유에 속한 개인에게는 개개의 특별한 이데아가 주어지지 않는다. 유개념 자체는 개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유개념이 현실화되는 개개의 경우는 에이도스(형상)가 현실화된 질료의 상이한 부분들에게만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것만이 고유한 의미에서 실체라는 그의 생각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후기 헬레니즘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개인이 훨씬 강조되었다. 즉 초기 스토아 철학과 중기 플라토니즘,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에게서 그런 현상이 두드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유의 개체는 그 질료에 따라서만 구별된다는 표상은 다음과 같은 포르피리오스의 명제가 등장하고서는 극복되었다.


'모든 개인은 그에게만 있는 속성과의 연결을 통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고전 헬라 철학의 평가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개인에 대해서 내려진 그 한계는 분명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론을 통해서 인간이 지상적 삶을 뛰어넘어 구원과 멸망에 관계해서 작용하며 그런 영원에 참여한다고 개방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혼은 불분명한 많은 재생 표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육체를 갖고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현존의 인격성과 일치될 수 없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개별적인 영혼은 그 개별적 영혼이 방식으로 개인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은 개체적으로 지상에 살아가는 현존의 한 뼘 거리를 초월해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플라톤이 말하는 이 현존의 개인성은 훨씬 무상하다.


이제 기독교는 인간이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체 인격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상은 이미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를 통해서 사전에 준바된 바였다.


이렇게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사신(私信)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사랑이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별 인간을 찾아오시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공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의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구원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무상하지 않는 생명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구원 사신은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으로 하여금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인간의 구성 요소로 파악했으며, 이렇게 규정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사상을 몸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몸으로 창조되고, 한편으로는 영혼으로도 창조된 자가 인간이라면, 몸 되시는 분이 몸의 구원에 개입해야 하고, 영혼 되시는 분이 영혼 구원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로써 이제 영원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플라톤적인 표상이 개인화 된 것이다. 요컨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이 지상적 현존은 이제 영원에 참여해야만 한다. 비록 그 현존이 영원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여전히 구체적인 몸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지상에서 개인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현존에게 영원한 의미를 제공했다. 당연히 이 지상적 삶에서 개개의 모든 인간들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멸망당하는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현존이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부여받게 된 새로운 삶의 무게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그 품격에 대한 생각을 기독교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나타났다.


키케로Cicero(106-32)는 인간의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면,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두었다.


창세기 9장 6절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우선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분명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의미가 심화된 인격(person) 개념이 이런 정황들과 연관된다. 이런 심화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는 개인의 품격에 대한 총괄 개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인격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분여될 표준적인 인격 개념이 선행된다.


인격적 개념은 극장의 세계에서 수행되는 라틴적인 요소들과 관련된다. 이것은 물론 헬라적인 세계에서도 비슷하다. 인격은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할 역할을 가르킨다.


여기서부터 이제 이 낱말은 어떤 사람이 연기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로 전가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서 바로 그 개인이 이러한 특징으로 일컬어지지 않고, 오히려 완성되어야 할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능이 특징화된다.


우선 로마의 법적 언어 안에서 인격이라는 말은 '임의의 개인을 위한 일반적 표시'가 되었다. 요컨대 매우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치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생각되었다는 말이다.


보에티우스Boethius(480-524)가 그 다음 시대에 권위적으로 받아들여진 정의에서 인격을 바로 위해서 설명한 것과 똑같이 추상적인 보편 개념으로 생각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겉보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을 '이성적 개체 본질'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보에티우스가 이 정의를 기독론적 교의의 기초로 설정하려고 했다면, 이에 따라면 예수 그리스는 두 본성에서 하나의 인격이 되는데, 그 예수님의 인간적 본성이 인격의 단일성에 내재한 신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된다.


레온티오스는 이런 관계를 명시적으로 주체화했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인격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고스의 인격이 그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적 관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로고스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 예수님의 '엔휘포스타지(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신적인 인겨 내에 존재한다 뜻)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두 본성 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이라는 기독론 교의가 삼위일체적 인격 개념으로 소급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엔퓌포스타지적 인격 개념만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인격 존재에 따른 규정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현존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구성적 관계에 의해서 '이성적인 개체 본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라카르트 폰 빅토르는 실존개념을 '타자로부터 온 존재'라고 해석했는데, 인간적 인격성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의 학설은 이런 영향을 받아서 수행되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을 인격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적 인격 개념이 함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첫 번째로, 다른 인격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를 구성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격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아버지이며, 역으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아들이다. 인간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나이다. 즉 신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피조물의 속성을 갖지만 또한 동료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사벨리우스는 삼위적 프로소포이의 삼위일체성을 그렇게 파악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확실하게 거부했으며, 따라서 인격 개념을 자신도 모르게 서구 신학을 벗어나서 실체(휘포스타시스)의 등가성이라는 새로운 의미에서 한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에 의해서, 세 삼위일체적 휘포스타시스, 혹은 인격은 서로 일치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고대 로마의 역할 개념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기독교 사상에서 인격성은 인격을 규정하는 상관개념이 손상받지 않고 늘 자유라고 생각되었다. 타자와 특히 고유한 인격의 신적인 근원과 자유롭게 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유 사상과의 이러한 연결은 기독교 사상에서 이성적 본질이 자유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도 역시 자유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을 가리켜 '자유로운 의지로 인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창조 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인격의 구성이 손상 받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구성하는 사태에서 자유롭게 이런 혹은 저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이레네우스는 그 뒤의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인류사의 초기에 있던 인간의 자유를 취약한 것으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규정되었으며, 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초기에 취약했던 의지는 자유는 튼실해지며 완성된다는 것이다.


근대 사상에서는 이 주관성이 인격적 자립에 속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주변 세계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근대의 존재 개념 중에서 극단적이라 할 이런 인간 이해를, 그것은 최초로 인간의 본질을 야기하고 있는데, 고대의 인간 이해에 대한 연구도 없이 전제되면 안 된다.


근대의 주관성 사상이 말하는 자명성에 우선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교만에 가지 이르려하는 본능적인 태도를 간과한 채 인식의 의지가 종속적 위치로 떨어졌다는 점인데, 이 인식이라는 것은 고전 헬라 철학에서 인간 주관성의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원칙이 한 예외가 궤변 철학에서 길을 냈다. 그러나 플라톤의 조명론이나 인식 사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인식을 수용의 과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를 간주되어야만 했는데,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수동적인 이성을 인간의 영혼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인식이 이루어질 때 자기 자신의 참된 것을 가능한 최선으로 순수하고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인간이 창조적으로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 내용이 변조시키는 원천으로 간주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인식과정에서 인식하는 자의 행위에 가장 우선적으로 공간을 제공하는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은 이 행위를 로고스의 진리와 조화되는 것에만 한정시킨다. 이 로고스의 진리 안에서 이 인식 행위는 자신을 그 받아들여지는 인상에 따라 나타낸다.


그리고 이 조화는 그 입장에 따른 똑같은 로고스의 활동이다. 로고스가 인간 영혼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한에서 말이다.


기독교 사상도 역시 철학적 학설을 다른 근거에서 교정함으로써 발생한 비의도적인 부수적 결과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인식 과정에서 인식하는 자의 창조력이라는 표상으로 발걸음을 딛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상기론을 출생 이전의 실존 표상으로부터, 또한 재육화론의 전체 복합으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mens(영혼)를 자신의 기본 구상으로 변형시켰는데, 그것은 곧 그 멘스가 영혼에 놓여 있는, 그리고 선행하는 앎에 대한 모든 경험의 보물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앎은 외적인 인상의 동기를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진리를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 활동은 여기서 여전히 조명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멘스(정신)론은 나중에 인간 영과 선험적 인식에 대한 표상의 선구가 되었으며, 이로써 같은 방향에서 키케로가 받아들인 분유관념을 강화시켰다.


보다 큰 영향력은 중세기의 기독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통해서 이리스토텔레스의 활동적인 누스(이성)을 인간 영혼에서 고유하게 활동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었다.


알베르투스의 경우에 이러한 번역의 근거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주어졌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멸성을 자신의 학설에 따라서 인간영혼에 속하지 않는 활동적인 누스(이성)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이성은 곧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개인적 영혼이 불멸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변역의 결과로 인해 서 인식 과정에서 '영혼의 활동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오컴과 그 학파의 인식론은 특히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철학은 인간이 영이 인식 행위에서 창조적이라는 논점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쿠자누스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창조적 행위에 상응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이로써 이제 인식 과정에서 인간의 영적인 주관성이 근대사상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물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와 인간적 경험과의 조화는 인식을 이미 주어진 진리로 해석함으로써 고대 인식론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인간 영이 바로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과 맺게 된 동질성을 통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물론 신학적 전제가 떨어져나가 버리면 창조적인 인간 영의 활동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틀림없이 모호해지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 인간 영이 활동은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는 사물을 그 존재의 특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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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사랑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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