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창조의 교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견해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과학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다른 주제에서와 마찬
가지로 과학의 영역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딤후3:16)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은 변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나타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하여 보다는 창조자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창1:1에서 2:3까지 모든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
이 나누셨다. 하나님이 부르셨다. 혹은 칭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두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쉬셨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창조는 지적인 하나님, 사랑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나타내 준다. 범신론과는 달리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과는 다르다(시90:2). 자연신론과는 달리 그는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시는데, 그것은 그가
만드신 것을 떠받치고 계시며, 유지하시며,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느9:6).
그 외에 나머지 성경에서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면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 분을 창조자로서 섬기며 예배해야 한다. (사40:26,28,31)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와 다투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사45:9) 우리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이신 그분께 부탁한다. (벧전4:19)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또한 인정한다. (렘32:17)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주이신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반복적으로 이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출20:11, 느9:6, 시146:6, 행14:17, 계4:11, 10:6)

이것은 성경계시의 특별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고대 이방종교나 현대 물질주의와는 달리 성경은 순수한 시작을 가르친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우주가 어떠한 형태로 신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었다고 가르치는 이원론을 보인다. 이방종교의 신화에서 신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선언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과 분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96:5)
물질주의자들은 물질과 그의 법칙은 영원하며 모든 존재의 총합계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모두 제외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며, 모든 것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라고 선언한다. (시90:2).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존재하도록 하신 참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성경계시의 중요한 사실은 창조가 삼위일체의 협동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신이 그 일부를 담당하는 것을 보인다.(창1:2) 신약은 우리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신 예수가(딤전2:5) 또한 창조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심을 더욱 계시한다. 상속자의 위치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골1:15) 창조에서 활동적인 집행자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말미암아”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dia)인데 제2의 집행자에 대한 단어로써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말씀하신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그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그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 이전에 계시며, 또한 보이지 않는 천사의 셰계의 창조주시다.(골1:16)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전개와 절정을 나타낸다.

전개와 절정은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성명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개인적인 배려의 증가에서 전개를 볼 수 있다. 채소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매....땅이...내니라”(창1:11,12) 짐승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고...하나님이...만드시니”(창1:24,25)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창조하시고”(창1:26,27)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사람은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이며 절정이며 인간에게 지배권이 주어졌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 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떠한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45: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떤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34: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창1:31)
성경적인 설명은 뚜렷한 창조의 단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뚜렷한 단계로 그의 계획을 이루신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창조시에 이어지는 날들에 대한 언급과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으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저녁이 되다”라는 말은 이 부분을 끝냈다는 것이고, “아침이 되다”라는 말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창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활동을 확대한 것이다. 즉,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을 단순히 진술한 것이고, 2장은 여섯 번째 창조하는 날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흙을 취하여 사람을 만드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이 짐승의 생명과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짐승으로부터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고전15:39) 흙으로 짐승의 생명을 창조하신 것은(창2:19) 하나님이 사람과 짐승에 대하여 같은 재료를 사용하신 것을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할 일을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여자를 만드셨다.(창2:21) 이와같이 이러한 창조에 대한 성경기록은 모든 생명의
형태가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수행된 점차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진화론적인 사상을 배제한다. 또한 그것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하여 모든 진화이론이 여자 이전의 남자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으며, 남자가 어떻게 여자로 진화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사람에 대한 진화론적인 근원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느 것도 사람이든지, 천사든지, 마귀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은 또한 확실하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인데 이 동사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하여 사용되며, 하나님이 색다르고, 전례없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사용된다. 땅이 반역하는 고라 일당을 삼키기 위하여 입을 벌렸을 때 “새일을 행하사”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피조물을 택하사”이다.(민16:30).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내가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bara, 창조하다)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출34:10)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나타내었던 이사야의 시대에 기적과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 일을 네게 보이노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사48:6,7)고 하셨다. 이와같이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하다”는 단어는 완전히 새롭고 전례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된다. 다른 경우에는 만들다.(히브리어 asah)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창조하다(bara)라는 단어는 이와같이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며 그의 창조행위는 독특하고 전례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잠16:4, 계4:11),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사43:7)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땅이 거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다.(사45:18) 이와같이 모
든 창조물은 그의 뜻과 능력의 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7) 즉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자아인식 및 자아표현이 가능하다. 도덕적 및 영적 이해력을 가지며,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사람은 예수 안에 완성된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이 창조물 안에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이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으로 취급되도록 의도되었다.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에 대한 계시와 그의 아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성격상 역사적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신약성경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첫사람 아담은 역사적 인물로서 인정하고 있다.(롬5:14, 고전15,45, 딤전2:13,14)

어떤 사람은 창세기의 처음 두장은 시가체(poetical)이며 비유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시가적인 언급과(신명기32, 33장, 욥38:4-11, 시90, 104:5-9) 비교해 볼때 창세기는 시가체가 아니라 산문체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시가체는 자주 사실적이고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으며, 시가체의 사용이 사건을 비유나 신화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비록 창조의 사건이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기술되고 있지는 않으나 이 사건들은 특이하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로 주어졌으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확실한 기록을 제공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요약하면 성경이 창조의 각 단계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저가 말씀 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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