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 환자 치료 중단했는데 오히려 살아나고…

임종예배 두 번 본 자궁암환자
아무 치료 안 했는데도
상태 좋아져 넉달 만에 퇴원
투혼 보이던 또다른 폐암환자는
고통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인공호흡기 튜브를 뽑다가… 
환자가 존엄한 죽음 선택하는
‘존엄사’ 존중받고 있지만
때때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며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뭔지
그 판단을 의사가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무덤까지 따라가 관 뚜껑을 열고서라도 데려와야 하는 직업이 의사다. 그런데 의미가 없는 생명연장에 불과한 치료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필요한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환자에게 주는 것을 존엄사라고 한다. 존엄사의 인정은 불필요한 의료비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암 환자가 지출하는 치료비용의 거의 절반이 사망 전 마지막 두 달에 집중되어 있다는 통계를 보고한 바 있다. 이렇듯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 때문에 남은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운동’도 벌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무엇이 의미있는 치료이고 의미없는 치료인지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결정할 것인가? 그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사람은 의사다. 의학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의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의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그의 회복은 의학적 설명이 불가능했다
약 20년 전, 서울 불광동 아파트에 살던 내게는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의 이웃이 있었다. 어느 날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부인이 내가 근무하던 지방의 한 대학병원으로 찾아왔다. 자궁근종으로 진단을 받고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 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떼어낸 자궁에서 평활근육종(uterine leimyosarcoma)이라고 하는 드물고 예후가 불량한 암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가 병원으로 다시 왔다. 수십개의 ‘결절’이라 부르는 혹이 피부 여기저기에 생긴 것이다. 조직검사를 했더니 전이된 암세포로 나왔다. 두어 달 뒤 아내가 내게 그의 집을 함께 방문하자고 했다. 병세가 많이 악화되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는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대화 도중에도 끊임없이 기침을 했고, 기침을 할 때마다 검붉은 피가 휴지에 묻어나왔다. 암이 이미 폐에도 전이된 것이다.
또 두어 달 뒤, 그의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환자가 쓰러져 곧 죽을 것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되겠냐는 전화였다. 나는 장례식장이 붙어 있는 근처 병원을 안내했다.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119 구급차를 타고 그 병원에 도착했는데, 원무과에서 말하기를 말기 암 환자는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받아줄 수 있지만 입원을 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으로 오시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맞았다. 환자는 쇼크상태로 혈압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의식은 희미한 상태였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폐가 있어야 할 곳이 새하얗게 보였다. 모두 암세포였다. 배에는 지름이 수십㎝에 이르는 커다란 종괴(장기에 발생한 종기)들이 만져졌고 악성 복수가 찬 듯이 출렁거렸다. 기본 혈액검사 결과에서는 혈소판 수치가 크게 떨어져 있는 등 ‘범발성 혈관내응고증’(DIC·혈관에 응고가 일어나 조직 경색과 괴사가 일어나는 증상)도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말기 암 환자는 중환자실의 입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중환자실의 침상은 부족하기 마련이어서 살 수 있는 급성기환자를 우선으로 입원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가 그날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중환자실 실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환자를 입원시켰다. 가족에게는 임종예배를 보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몇 시간 뒤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교인들이 왔다. 목사님도 도착하여 막 임종예배를 시작하려던 순간 어떤 분이 나를 잠깐 보자고 하셨다. 자신을 교회의 수석장로라고 소개한 그는 “저 사람은 죽지 않을 사람인데 임종예배를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질타를 하셨다. 의사가 아닌 분이 의사인 내게 “환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만 환자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러는 것이려니 하면서 무시했다. 결국 임종예배를 보았다. 환자는 그날 밤을 넘겼다. 다음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환자의 의식은 거의 소실됐고 폐 기능은 더욱 떨어졌다. 저녁이 되자 몇몇 가족들이 전날 임종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임종예배를 한 번 더 드리기를 원했다. 가족들은 결국 두 번째 임종예배를 드렸다.
기적은 그 다음 나타났다.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진 것이다. 1만개가 채 되지 않던 혈소판 수치(정상 15만 이상)도 불과 사흘 만에 10만개로 상승했다. 두 달 뒤 환자는 병원 마당을 산책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됐고 입원 넉 달 만에 걸어서 퇴원했다. 암 말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학적 치료는 전혀 없었다. 퇴원 뒤 외래에서 만난 그는 호흡곤란도 없었고 별다른 증세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의 의학적 소견이었다. 흉부엑스레이도 암 전이 상태 그대로였고 피부에 올라온 수십개의 결절도 그대로였다.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배에서는 여전히 종괴가 만져졌다. 약 2년 동안 간간이 외래를 방문하며 건강상태를 확인하던 그는 약 3~4년 뒤 연락이 끊겼다.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환자에게 일어난 기적은 ‘무의미한 생명연장’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한 나의 상식과 자신감을 없애버렸다.
심낭창조성술과 1년 뒤 분홍빛 매니큐어
내과에서 진료의뢰가 들어왔다. 환자는 강원도에서 온 40대 초반의 여자 환자였다. 자궁암이 진행돼 암세포가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에 전이가 되어 심장 주변에 물이 차서(악성심낭삼출) 심장을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심장이 눌리면 폐로부터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가 원활하게 순환되지 못하므로 폐가 울혈 상태에 놓이게 되어 숨이 가빠진다. 환자를 처음 보았을 때 환자는 숨이 너무 차서 눕지도 못하여 차가운 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를 세운 뒤 기대어 앉아 헐떡이고 있는 상태였다. 심장을 누르는 물을 빼기 위해 심낭에 튜브를 삽입하여 물을 빼어주는 심낭창조성술을 해야 했다. 환자는 튜브 삽입 뒤 빠르게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암 때문에 발생한 악성심낭삼출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경우 예후는 대체로 매우 불량하다. 약 일주일이 지나자 환자는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악성삼출은 하루에 수백㏄씩 계속되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몇 주 뒤, 다행히 심낭에서 나오는 악성삼출이 줄어들었다. 튜브도 뽑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년쯤 지났을까? 외래 진료 중이었다. 짙은 화장에 얼굴에는 은빛가루를 뿌려 한껏 멋을 낸 긴 머리를 가진 여성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그는 차트를 들여다보는 내게 “선생님,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선생님, 저예요 저….” 차트를 들여다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눈 앞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는 일년 전 진행된 자궁암으로 심낭에 튜브를 넣었던 바로 그 환자였던 것이다.
환자는 퇴원 후 특별한 치료를 받지도 않았고 검사를 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라며 검사를 해보자는 내 권유를 무시하고 병원을 떠났다. 말기 암에 대한 나의 의학상식이 두번째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제발, 제발 떠나게 해달라”는 호소 앞에서…
나는 성인 심장수술이 전공분야였지만 폐수술 담당교수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경우 간혹 폐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기 폐암 진단을 받은 30대 후반의 여성을 수술하게 된 것은 그런 경우였다. 나이 차가 꽤 나는 남편과 일찍 결혼한 그 환자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두고 있었다. 폐암 진단을 받았지만 검사 결과 다행히 초기 상태여서 수술이 결정되었다.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폐를 떼어낸 뒤 찾을 수 있는 임파절들도 모두 찾아내어 떼어냈다. 그런데 폐를 떼어내고 난 뒤 가슴을 닫으려는 순간 절개 부위의 흉벽에 좁쌀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크기의 결절이 살짝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수술을 위해 가슴을 여는 부위에 있어서, 수술 도중에는 내내 가려져 있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납작했고 여러 개가 아니라 한 개뿐이어서 전이된 암덩어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무시할까 했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절을 떼어내고 수술을 마쳤다. 며칠 뒤 나온 병리검사는 큰 충격이었다. 흉벽에서 떼어낸 작은 결절이 전이된 암으로 나온 것이었다. 무척 드문 일이었다. 흉벽의 전이된 암 그것 하나 때문에 환자의 진단이 조기 폐암에서 진행된 폐암 즉 4기 폐암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환자는 수차례의 항암치료를 잘 이겨내고 퇴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환자가 병원에 와야 할 날짜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가 남편과 함께 외래 진료실로 들어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수술을 한 쪽에 악성흉수(악성종양으로 인해 폐가 들어 있는 공간인 흉강에 물이 차는 현상)가 가득 차 있었다. 환자에게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는 입원을 거부했다. 결국 외래 진료실에서 주사기로 악성흉수를 1리터 가까이 빼냈다. 환자의 호흡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얼마 뒤 환자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늑골(갈비뼈)에 전이된 암으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운 통증 때문이었다. 나는 마취제로 늑간신경차단술을 하여 통증을 덜어주었다. 그 후에도 환자는 악성흉수가 찰 때마다, 통증으로 못 견딜 때마다 나를 찾았다.
어느 날, 그의 남편이 내게 집으로 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너무 숨이 차서 병원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퇴근 뒤 주사기를 챙겨서 환자의 집으로 갔다. 환자의 집은 내가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악성흉수를 빼고, 늑간신경차단술을 다시 해주었다. 그렇게 수차례 환자의 집으로 다니던 중, 내가 살던 집의 전세의 만기가 되었다. 아내가 내게 말을 꺼냈다. 어차피 이사를 가야 하는데, 환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환자에게 기도를 해주기 위해 몇 차례 환자 집을 방문한 터였다. 나는 환자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마침 위층에 전셋집이 나왔는데, 내가 그리로 와준다면 좋겠다고 답했다. 얼마 뒤 나는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환자의 가족과 위아래집 이웃이 된 이후, 나는 수시로 드나들면서 악성흉수를 빼내고, 늑간신경차단술을 반복했다. 환자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방문하는 간격은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환자가 자력으로 숨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예전의 환자처럼 중환자실로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걸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인공호흡기가 걸려 있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던 환자는 수첩으로 나와 대화를 했다. 그는 “살고 싶어요”라고 썼다가도, “이제 그만 보내주세요”라고 쓰기도 했다. 그의 생명을 붙잡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묶인 손을 움직여 스스로 인공호흡기와 연결된 튜브를 뽑았다. 중환자실은 간호사가 환자 옆을 24시간 지키고 있으므로 곧바로 발견되어 다시 튜브를 삽입하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그는 다시 튜브를 뽑았다. 나는 연락을 받고 그에게로 갔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잘 나오지 않는 여리고 쉰 목소리로 “제발…”이라고 겨우 말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가 말한 ‘제발’은 제발 더 이상 인공호흡기를 걸어 고통을 연장하지 말고 자신을 이제 그만 떠나게 해달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그를 바라보았다. 의학적인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예전 환자처럼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의 바람대로 해주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걸기 위한 기관 삽관을 하지 않았고 그의 곁을 지켰다. 약 10여분 뒤 그는 평안히 먼 길을 떠났다.
그에게 다시 튜브를 삽입하고 인공호흡기를 걸었더라면 환자의 생명은 조금 더 유지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처럼 불치의 병으로 죽음이 예고된 상황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은 것은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만일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 등을 사용하여 죽음을 더 빨리 앞당긴다면 그것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나라 법과 윤리는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을 하고 있으나,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을뿐더러 윤리적으로도 용인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극적 안락사가 의사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의사가 소극적 안락사를 결정할 때에도 반드시 환자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라는 단어보다 환자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존엄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최근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가족 동의 하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할 수 있는 안이 마련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신이 아니고 의학적 통계에 의해 판단하는 과학자일 뿐이다. 의사의 상식을 비웃으며 죽음의 문턱을 딛고 걸어 나오는 환자가 존재하는 한, 생명연장이 의미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는 의사의 역할은 어렵기만 하다. 그것은 의사의 몫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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