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 속에 피는 꽃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8. 1. 25. 00:51

 


 
 

꽈르릉 쾅쾅!”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새파란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들이닥친 스바인들의 무지막지한 칼이 두려워서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목자들은 속수무책 그 많던 주인의 가축을 몽땅 빼앗긴 채 나머지 짐승들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광야의 험한 길을 달려 도망치던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수십만 볼트가 넘는 벼락이,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달아나는 목자들과 허둥거리는 나머지 가축을 무섭게 그리고 정확히 따라 덮쳐 순식간에 새까만 재로 태워 그 자리에서 화장시켜버린다
.

고향에는, 중무장한 “갈대아” 인들이 떼로 몰려들어 평화로운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휩쓸었고, !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볼 사이도 없이 집 안팎 구석구석에 감추어둔 각종 보화와 남녀 종들을 강탈하여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때마침, 그날은 10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딸 중, 가장 맏아들의 생일이다. 동네에서도 형제들의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그들, 초청을 받은 형제.자매가 한 명도 빠짐없이 큰형님 댁에 모두 모여, 화기애애잔치를 배설하고 즐거운 음악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음꽃이 온 동네로 퍼져 나가던 지극히 흐뭇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바로 그때,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갑자기 거친 들에서 대풍(tornado?)이 불어오더니, 집 모퉁이를 !” 하고 내려쳤다. 그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초광속이었던지, 고래 등 같은 큰 집이 썩은 나무 등걸이 쓰러지듯 와르르~폴싹!”무너져 내렸다. 앗 뿔 사! 그 집 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질 않은가? 안타깝게도 그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하고 무너진 집채 아래 모조리, 한꺼번에 산채로 매장되고 말았다는 슬픈 비보가 날아든다. 정말 어이없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

이토록 끔찍한 이야기가 픽션(Fiction)이냐? 아니다. 그럼, 저주받은 죄인의 집이었나?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Nonfiction). 하루아침에, 이토록 끔찍한 참사를 당한 사람은 누구냐?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불리던 의인, 욥이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이라 불리는 이 의로운 사람의 엄청난 무게의 고난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고난의 역사. (물론,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지만…)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민족이 요셉이 살아 있는 날 동안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다. 그러나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이 세운 공훈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 왕이 즉위한 후, 노예 생활로 전락해버렸고, 그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스라엘은 또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로서 핍박을 받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

우리나라 또한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다.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라를 잃고 일제 치하에서 당한 설움과 고난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역사를 배울 때나, 또는 고난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할머님들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나라를 잃었기에 당했던 그분들의 어려움이 어떠했던가, 가히 짐작하고 남을 만하다. 뿐만이 아니다, 6.25동란 역시 고난의 역사를 대명하고 엊그제가 바로 그 고난의 시기, 6.25동란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6.25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날이요, 결코 그 고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새롭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하리라
.

이렇게, 고난이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고, 개인에게도 찾아오지만, 국가적으로도 찾아오며 또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물론, 고난도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고난 없이 한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받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옛 성인들이 말했던 것일까
?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반응(reaction)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고난 앞에서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무릎을 꿇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여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이라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렇다면 내게 닥쳐온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겠다


고난이라고 하여도 모두 같은 고난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출처가 어디로부터인가 분명한 이유를 분석해야 그에 대한 대비책도 다르게 세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사람이 어려움에 빠지고 고난을 당하는데는 대개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

자신의 죄(실수건 고의건)의 결과로, 혹은 실수를 통해서 오는 고난이 있다
.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겪게 된 그 엄청난 고난은 순전히 다윗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온 것이다.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다. 그 죄 때문에, (죄를 지으면 죄(사단)가 그 문 앞에 엎드린다( 4: 7절 참조))그 죄의 값으로 그 가정과 국가에 큰 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섭다.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왠만큼 그냥 슬쩍 넘길 수 있다고 생각지 마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12: 59 절 말씀)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

그러나 또 어떤 고난은 죄가 아닌, 자신의 무지나 실수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업가가 사업을 위해서 자본을 빌렸으나 그 사업 경영을 잘못하여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빚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크게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빚 때문에 자신도, 가족도 극심한 고난 속에 빠진 분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이런 것은 악한 뜻이 아니기에 죄라기보다는 능력 부족혹은 실수라고 봐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도 팔자 탓, 혹은 재수가 없는 탓이라고 돌려버리지만ㅠㅠ
)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고난 속에 빠졌다면.ㅡ 먼저 자신의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먼저 고난의 원인(출처?)부터 규명하는 것이 지혜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겪게 되는 고난이라면 속히 자수하여 광명을 찾자? ㅋㅋ. 그런 때는 속히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실수로 오는 고난이라면 그 실수한 부분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 다시 일어서기 바란다. ^^ 문제는 불가항력의 고난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늘 “욥”이 당한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나는 자기 죄로 오는 것, 혹은 실수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의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런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가 처해야 할 바른 자세를 좀 배워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태어나 보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장애인’이더라.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면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1)
불가항력의 고난이 닥쳤을 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란 본래 형통할 때는 기뻐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는 대개 불평과 원망을 품기 쉽다
. 어떤 사람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죄 없는 하늘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닥친 고난이나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떼죽음을 죽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져 죽은 이유가, 적군의 칼과 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이 어이없는 사실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반면,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큰 고난의 수렁에 빠진 사람, 욥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정말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세세 무궁토록 빛날 고백이며, 한낮 일개 촌부였던 그를 믿음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획득하게 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


2)
불가항력의 고난을 겪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칫,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절망이란 묘한 감정이어서 절망과 친하면 친할수록 주위가 점점 더 새까맣게 둘러쳐진 압박감을 받게 된다. 그 감정이 점점 더 강해지면, 어떻게 하든지 현실에서 도피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마음을 사단이 붙들고 충동질한다. 자살미수에 그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같은 상황인데,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떤 강렬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죽어라! 죽는 것만이 너의 최선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다.” 이런 음성이 선명하게, 강하게, 극렬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또 더 심하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까지 환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단다. 이런 페닉(Panic) 상태가 길어지거나, 심각해지면, 자살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애석한 일인가?

3)
() 속에서 피는 꽃을 배워라


모든 만물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하여도 복수화(福壽花, Adonis amurensis Regel et Radde 일명 빙량화(氷凉花), 아직 추운 2월 말 3월 초에 눈을 뚫고 새순이 나고 꽃이 피어나므로 설연(雪蓮)이라고도 함)는 핀다는 것을 아는가? 복수화는 우리나라, 중국 등지에서 노란색, 서구에서는 빨간색으로 아름답게 피는 겨울꽃이다.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에, 새하얗게 눈 덮인 대관령을 오르노라면 놀랍게도 그곳에서 눈을 뚫고 피어난 진기한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한 번도 그 진기한 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ㅠㅠ). 빙량화(氷凉花) 듣기만 하여도 멋진 꽃일 것 같지 않은가?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 애잔하고 더욱 찬란하게 보일 것 같다
.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이란 안전하고 평안한 가운데선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믿음은 눈()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난이 없으면 그의 믿음이 큰지, 작은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믿음에도 경중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믿음이란 입술의 유희가 아니다. 말로만 내가 잘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의 진가가 들어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믿음은, 눈 속에서 피는 꽃과 같고, 환난과 역경 속에서 달구어지는 정금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 사람의 믿음을 시험(temptation이 아닌 test)하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고 강한 훈련을 시키듯, 주께서는 그 자녀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강훈련을 시키심을 알아야 한다
.

성경 66권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 믿음의 진가를 인정받았고 빛을 발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다. 다윗 왕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스데반 집사가 그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모두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그 자신도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신 후에, 구속주로서 그 빛이 세세 무궁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신구약 66권을 통털어 고난 없이 그 믿음의 빛을 발한 사람이 누가 있더란 말인가
?

성경을 떠나 인간 역사를 잠시만 그슬러 올라가 보아도 알 수 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The north wind made the Vikings)”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속담이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무슨 뜻인가? 그 뜻은 그들에게 험한 북풍이 있었기에 강력한 군대, 강력한 인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북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만들 수 있었고 거친 기후와 거친 땅 이라는 악조건이 있었기에 일찍이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던 악조건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

바이킹은 9-11세기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연안을 휩쓸고 북미와 그린랜드까지 진출할 정도로 강력했었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건조했고 바이킹이란 말은 전진과 모험의 상징이 되었다. 바이킹, 그 위대한 이름이 환난과 고난 속에서 꽃피운 이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개인이라면, 고난을 겪게될 때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생각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은 밤이 있으면 낯이 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있어야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지 않듯, 삶도 그러하다는 것만 깨닫고 명심한다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영원토록 지옥 형벌을 자취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실존철학자 키엘케골이 말한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다.”라고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서 예리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지 모서리를 깎아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라고, 그런고로, 고난을 당할 때, 절망은 금물이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권고하신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 71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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