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새 소망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8. 1. 13. 02:58
사진: USA아멘넷 기사 중
새해에 새 소망
벽에 뎅그러니 매달린 한 장의 달력, 그것도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하다. 엊그제가 희망찬 1월이었고, 마음마저 한껏 부풀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건만, 벌써 이 한해도 이렇게 떠나겠다며 속절없이 고별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아쉬움 반, 후회 반, 알 수 없는 초조함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싫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마지막 남은 그 한 장을 북~ 뜯어내고 새로운 숫자가 반짝이는 새 달력으로 바꾸어 걸고 나니까 기분이 한결 산뜻해진다. 낡고 찌든 해(年)여, 가라! 이제는 대망의 새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듯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세기를 두고 가고 오고, 오고 가는 해(年), 숫자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새해(New Year), 그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우리 조상님네들은 문제와 함께 허우적대다가 모두 각기 자기 갈 곳으로 떠나갔다. 우리라고 하여서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새해에도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난과 역경도 상대적인 것, 우리의 삶이 비록 고달프고 어렵다고 하여도 큰 재난을 당한 필리핀 국민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여도 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의 백성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가족을 ‘호스피스’에 보낸 분들만큼이야 고통스럽겠는가?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나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란 것이다.
새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이, 어차피 걸어야 할 길,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새 소망”으로 가슴 한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잠시 있다 사라질 이생의 안목으로서 “희망”이 아니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참된 소망, 새 소망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런 암흑기에 새 소망이라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새 소망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새해 새 소망으로 삼으라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여기에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고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성도에게 소망이 가장 절실한 때는 안일한 때가 아니라 극한 환난을 통과해야 할 때이다.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11장을 보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온갖 고난과 고통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과 현대 신앙인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길, 곁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히 11: 12: 12-13절 참조 )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싫어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온갖 악형의 고문으로 핍박하고 저주했다.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고 목 베이는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형을 견딜지언정 비굴하게 세상이 내어 거는 조건을 수락하거나 석방운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찬양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진리 수호란 명제 아래 신의를 저버리기를 무 자르듯 쉽게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허다한 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신앙인의 길이란 말인가…씁쓸해진다.
또 생각해보니 우리가 젊어서는 작은 여드름 하나에 웃고 울고 한 것이다. 그때는 그만큼 순수했었거나, 아니면 젊은 시절은 그만큼 평화스러운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여드름 같은 작은 문제 따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극히 작은 문제(miner things)란 것을 알게 된다. 날마다 눈앞에 닥쳐오는 문제들이 그만큼 더 무겁고 큰 것들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크게 당황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고난의 실제 무게일 수도 있고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도 안일하게 사는 탓에 느껴지는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대 신앙가들의 실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대인은 초대교회 성도님들과 같은 불같은 시련은커녕, 기복신앙으로 길들어져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고, 십자가의 길이란 믿음의 선조님들의 전설같은 이야기일뿐, 십자가는 그저 하나의 장식 목걸이 정도로 착각하는 우리네들, 내가 잘하면 복 주고 내가 잘못하면 당장에 저주하는 하나님,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짬뽕시켜서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란 직책을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죽어서나 만나보는 염라대왕쯤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 믿음의 길은 어떤가?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안이한 삶을 추구하는지, 넓디넓은 길, 그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의 끝(last destination)은 어디가 될 것인지,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이 어디로 연결돼 있는지,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러분과 내가,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 한 분만을 절대 소망으로 삼고 환난 중에서도 담대하고 어려움을 당하여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면, 바른길, 옳은 길, 의의 길을 잘 달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글쎄다.
새 소망을 바라는 이는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본문에서 우리(성도)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위엣 것을 ‘찾으라, 찾는다.’라는 말의 원어는 “제테오”이며 그 뜻은 ‘탐구한다, 얻기 위해 애쓴다, 열망한다.’ 이고, ‘생각 한다.’라는 것은 원어로 “프로네오”, 즉 ‘마음에 둔다, 마음을 기울인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에다 마음을 기울이는지 비례하여 그 사람의 길이 정해질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자면,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향락이면 향락의 길을 택할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를 생각하다가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마음에 두고 날마다 생각하다가 두 눈 모두 빼이게 되었고 결국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이 위엣 것,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얼굴빛을 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형이상학적인 삶, 믿음의 삶, 역동적인 삶, 창조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위에는 우리의 산 소망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며 응원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 119: 105)"
세상이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D.L 무디의 성경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D.L 무디", 그의 성경에는 구구절절 색연필로 그어져 있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T.P]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Tried and Proved’(“시도해 보았고, 입증되었다)"라는 뜻이다. 무디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느 말씀, 어느 구절 하나라도 생활 속에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이 없으며, 그 말씀은 곧 그대로 그에게 생명과 능력과 광명이 된 것을 체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 자리가 전무함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내 앞에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다고 하자. 나는 목이 마르다. 시냇물이 제아무리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내가 그 물을 떠서 내 입으로 마시지 않는다면, 그 시냇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 약속하신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경 말씀이 그저 먼 이야기, 하나의 고서(古書)로 느껴질 뿐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 중 어떤 것 하나라도 이루어 주셔야 할 아무런 의무 또한 없으시다. 그렇지 않은가?
가시덤불 같은 재리의 염려, 돌짝 밭 같이 딱딱한 마음, 이런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모두 막혀버렸으니 말씀의 능력도 죽은 것이다. 그 약속이 효력발생 무(無)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어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먼저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내가 먼저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는 결단 없이는 환난날이 와도 그 환난을 이길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 10절 말씀)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모진 겨울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초저녁 어스름 달빛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그러나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짙은 어둠은 무섭기까지 하다. 어찌보면 인생은 늘 고해 속에서 고통 받는 중, 내일이면 오늘보다 나은 날이 오겠지, 기대하다가 오지 않는 유토피아로 점점 더 짙은 절망감에 시달리다 끝내 영원히 사그라져 버리는 별똥별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현명한 독자님들은 지금쯤 결론을 이미 내리고 계실 것도 같다. 한 마디로, 죄지은 인간, 그 자체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르면 시커먼 흑암 같은 병마가 생을 덮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 형벌로 이어지는 참담한 것이 죄지은 인생의 결국이란 것이다!!
뭔가 새로운 소망(희망)을 가지기 전, 인생은 어렵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 뭐가 있을까?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모든 사람이 간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인간)에게는 정말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그 답은 미안하게도 ‘인생에 희망이란 없다.’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인생의 깊이를 논하는 철학자도 아니다. 다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을 체계화시켜 본 것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 투성이인 인간이 보일 것이다. 지식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민은 더 많아지고, 그리고…인생의 결국은 슬픔과 고뇌뿐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니까!
성도라고 하여서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그리스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
성경에서 1518번이나 재림을 약속하고 있으니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 소망이시며 우리가 품어야 할 새 소망이 되신다. 온 천지가 둘러 꺼지고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다. 주 안에서의 소망은 잠시 있다 사라져버릴 세상적 “희망”과는 다르며, 이 땅 위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든든하고 성령 안에서 영원히 보장된 소망이기에 확실한 근거가 된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바라면서 그 얼굴빛을 항상 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길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사람은 새해는 새 소망으로 채워지는 넉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을 바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진 2014년, 이 한해를 승리하는 해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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