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논란이 많지만, (‘핫지’(Hodge), ‘바레트’(Barrett), ‘메이어’(Meyer))등 ‘기록한 말씀’을 가리키는 원어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점에 착안, 여기서도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반면, ‘칼빈’ (Calvin)이나 ‘루터’ (Luther)등의 개혁자와 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록한 말씀’이 4장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내용 아니면 1-3장에서 인용된 구약 성경을 뜻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계 22: 18-19절 참조) 어쨌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의 진보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순전히 영적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고전 4: 8) 여기에서 “왕노릇..” 이란 영적 교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힘과 능으로 더하여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오늘도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며 신앙생활의 승리를 쟁취하게된다.

믿는 자는, 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다.(고전 12: 3참조)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죄 또한 이길 힘을 공급받고, 죄를 지으면 개인 교회의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시기에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데 목숨을 걸어라! 기록된 계시 속에 모든 답이 있다. 성경이 text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신학자들의 깨달음도 역시 성경 속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신학서적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 그러나 그 모든 훌륭한 신학자님들의 말씀일지라도 성경 위에 둘 순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날마다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주셔야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글을 읽는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각 심령에 두루 비치시사 옳은 길, 의의 길로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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