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방식으로 부모의 구원이 자녀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고요?

 

(도르트 신조 중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7장의 내용과 관련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향하는 일부 개혁파 교회에서 언약의 방식으로 부모의 구원이 자녀들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가르친다. 저들은 이런 사실의 근거를 도르트 신조의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7장에서 찾는다.

 

도르트 신조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녀들이 택함을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창 17:7; 행 2:39; 고전 7:14)"고 기술하고 있다.

 

상기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믿는 부모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신적 언약)으로 인해 자녀들이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창 17:7/행 2:39/고전 7:14을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본 내용에서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표현은 자녀들도 본성상 원죄의 영향을 받은 죄인들로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로 인해 인식기능이 불완전한 어린 자녀들은 개인적/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부모와의 언약관계에 근거해 혈통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증거본문으로 제시된 성경구절들이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믿는 부모들의 어린 자녀들이 본성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롬 3:10; 5:12), 그리스도의 구속이 아닌 부모들과의 언약적 연대성에 의해 혈통적으로 선택적 구원이 가능하단 말인가(선택적 구원은 창세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증거본문이 이상의 사실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단 말인가? 어린 자녀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아닌 부모와의 언약관계에 근거해 가능하다면 선택과 신적 언약은 그 기원과 성격이 본질상 다르단 말인가?  

 

이상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본 주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한다. 위의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중요한 관점은 각종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나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정리된 신앙적/신학적 산물들이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 개혁주의 고백서나 요리문답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를 교리적/체계적으로 정리한 성경해석과 적용의 탁월한 지침서로 기능할지라도 성경과 동일한 가치와 정도의 절대규범으로 수납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의 제 2 규범은 될 수 있을지라도 성경과 동일한 수준의 제 1 규범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은 원본과 관련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서로 절대무오함에 비해 각종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시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합의된 신학적 연구의 산물들이기에 진일보된 21세기의 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 해 볼 때 부분적이나마 해석상의 오류의 개연성과 이로 인한 추가적인 수정과 보완의 필요성이란 과제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가 이런 사실을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식적으로 과감하게 지적함으로 감히 메스를 댈 수 있는 가의 문제는 별개이겠지만 말이다. 본 주제 또한 이런 문제 중 하나로 지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 주제와 관련된 문제점들을 증거본문을 통해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1. 창 17:7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들의 정체성은 본질상 혈통적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롬 2:28-29, 9:6-7).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영적 자손을 가리킨다(갈 3:7, 29).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들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 천상적 교회 공동체를 총체적으로 가리킨다(엡 2:11-22). 따라서 창 17:7에 근거해 어린 자녀의 선택과 구원의 문제를 부모와의 언약의 연대성과 혈통적 계승의 관점으로 정당화시키려는 태도는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의 결과로 사료된다.

 

2. 행 2:39에서 언급된 부모/자녀의 구원에 관한 언약적 약속의 연대감은 자체 문맥을 통해 단순한 부모-자녀와의 혈통적 관계에 근거한 보증의 약속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39절 말미를 유의해 보면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전제 조건이 부가돼 있다. 본절에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란 표현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소명을 가리킨다(엡 1:4-5). 그러므로 행 2:39은 자체 문맥 안에서 단순한 부모-자녀와의 연대감이나 혈통적 관계에 근거해 구원이 약속의 방식으로 보증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경우건 죄인이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방식 외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 같은 진술이다(엡 2:8).

 

3. 고전 7:14은 부모 중 한 편의 믿음 여부가 그들의 자녀들을 (혈통적 관계)로 인해 거룩하게 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된 거룩의 의미를 단순히 구원의 보증으로 해석한다면 다소 비약의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구원의 정체성과 관련해 보다 명백한 구절을 인용한다면 요 1:12-13을 들수 있다. 특별히 요 1: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사람의 혈통/육정/뜻'으로 말미암을 수 없음을 확고하게 증거한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주권적 선택 사상)로 제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고전 7:14에 언급된 거룩의 의미는 자체 문맥 안에서 '거듭남의 구원과 이로 인한 신분의 변화'라기보다는 믿는 부모에 의한 선한 간증의 삶을 통해 자녀들이 선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부부간의 경우에도 동일한 관점으로 추정된다). 구원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 없기 때문이다(엡 1:4-5; 고전 12:3; 행 11:21; 13:48; 16:14; 딤후 1:9). 아울러 요 1:12-13절의 해석과 적용은 단순히 성인 남녀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유아들까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불변의 말씀임에 틀림없다.

 

4. 선택과 신적 언약은 그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본질상 다르지 않다. 공히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영원한 구속언약으로 설명되고 있는 에베소서 1장 4절-14절 및 디도서 1장 2절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자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곧 하나님의 택자가 된다. 결국 선택과 언약은 본질상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상의 관점을 정리하면 성경은 결코 한 사람의 구원 여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방식 외에 다른 방도의 개연성을 결코 허락지 않는다(엡 2:8). 만일 그리스도의 구속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가능할 수 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허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마 1:21; 막 10:45; 행 4:12).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선택적 은혜에 근거할 뿐이다. 사람의 혈통과 육정과 뜻으로는 절대 불가하다(요 1:12-13).

 

아울러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임에 반해 각종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대의 권위 있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여러 교회회의를 통해 합의/정리된 연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진일보된 신학적 관점으로 조명해 볼 때, 전자는 시공을 초월해 만고불변의 진리요 여전히 신앙과 삶을 관장하는 유일무이한 최고의 가치와 규범으로 기능할지라도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제 2의 규범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의 필요성이 상존할 수 있는 시대적 산물이다. 결코 성경과 동일한 권위와 가치를 지날 수 없다. 이들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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