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 혁명'과 새 관점 학파

길성남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시작하는 말

지난 20여년 사이에 출간된 신약성경 연구서들과 주석들에는 E. P. 샌더스라는 이름과 함께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샌더스와 새 관점 학파의 학설을 알지 못하면, 신약성경, 특히 바울서신 연구서들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1977년에 샌더스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이라는 신기원을 이루는 저서를 출간한 이래, 많은 성경학자들이 바울과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새 관점' 학설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 관점의 틀 안에서 바울과 그의 서신들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신약학계에도 새 관점 학설을 적극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표현은 영국의 성경학자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이 1982년에 처음으로 사용하였지만, 새 관점 학설을 서구 학계에 최초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미국 텍사스 출신의 E. P. 샌더스이다. 오늘날 샌더스와 함께 소위 새 관점 학파(샌더스 ‘학파’라고도 함)를 이끄는 대표적인 학자들은 제임스 던과 N. T. 라이트인데, 이들을 가리켜 새 관점 학파의 삼총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세윤은 종교 개혁 이래, 어떤 학파도, 심지어 불트만 학파조차도 새 관점 학파보다 바울 학계에 더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샌더스의 저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1977)의 출간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만큼 제2 성전 유대교와 바울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샌더스의 영향력의 지대함 때문에 최근에는 '샌더스 혁명'(the Sanders revolution)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학자들까지 있으며, 바울 연구의 역사를 ‘샌더스 이전’과 ‘샌더스 이후’로 양분한다.

E. P. 샌더스와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러면 샌더스가 제시한 새 관점 학설이란 무엇인가? 이 학설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바울 당대의 팔레스틴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는 것이다. 언약적 신율주의란 샌더스의 신조어로서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을 중시하고 율법 준수(nomism)를 언약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는 언약적 종교임을 뜻한다. 샌더스는 주전 200년에서 주후 200년 사이에 기록된 유대 문헌들을 분석하면서, 그 문헌들에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언약 백성이 되며, 율법 준수란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상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발견한다. 샌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교에서 율법 준수란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getting in)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staying in)과 관련이 있다. 이는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을 준수하여 자기 의를 세움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한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유대문헌 분석에 근거하여 샌더스는 유대교의 종교 유형을 언약적 신율주의로 규정하면서 유대교가 기독교와 매우 흡사한 은혜의 종교라고 결론을 내린다.

샌더스의 이런 주장은 종교개혁 이래 5백년 가까이 바울 연구 분야를 지배해온 개신교의 전통적인 견해를 뒤엎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만일 샌더스의 견해가 옳다면, 사도 바울의 유대교 비판은 물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도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유대교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강조한 은혜의 종교였다면, 대체 바울은 무엇 때문에 유대교와 유대주의자들을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했는가? 샌더스는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비판을 율법주의, 또는 선행으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교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크게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것은, 유대교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즉,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 것이 유대교 비판의 근본 이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샌더스는 바울에 대한 개신교의 전통적인 해석 체계에 대대적으로 도전하였다. 그의 도전은 1세기 유대교의 적절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서 바울과 칭의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D. G. 던과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영국 덜햄의 신약학자 제임스 던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샌더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이유를 샌더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그는 “율법의 행위들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바울의 진술에 주목하고, ‘율법의 행위들’을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들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샌더스가 '율법의 행위들'을 언약을 유지하거나, 또는 언약 안에 머무는 수단으로 간주한 것에 비해, 던은 마카비 시대 이래 가장 분명하게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해 주는 일종의 경계 표식들(boundary markers), 즉 할례, 안식일, 음식법 등을 지키는 행위로 본다. 바울 당대에 이것들은 특정 개인이 유대 언약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적 신분 표지(badges of identity)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유대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이방인들은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야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것은, 율법의 일부 규정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경계 표식으로 여기고, 이방인을 배제한 채 유대인만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는 민족적 배타주의 때문이었다.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근거하여 던은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배격한다. 던에 따르면, 이신칭의는 신자 개인의 구원을 규정하는 교리가 아니라, 안디옥 사건(갈 2:11-14) 이후에 바울이 확립한 일종의 논쟁적 교리, 또는 이방인 선교를 위한 교리다. 즉,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들 없이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한 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신칭의는, "어떻게 개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어떻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N. T. 라이트와 이신칭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새 관점 학파 삼총사 가운데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영국 성공회 덜햄의 감독인 N. T.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이다. 라이트는 유대교와 바울에 대한 샌더스의 새 관점을 최초로 지지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1978년에 유대교는 행위-의를 추구한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며, 유대교에서 ‘선행’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자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율법의 행위들'과 관련해서 라이트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제임스 던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율법 일반을 준수하는 행위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하는 기능을 가진 율법의 일부 조항들을 준수하는 행위들이다. 따라서 1세기 유대교의 문제는 율법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믿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의 이신칭의를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반대한 것으로 이해한 종교개혁자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이 1세기의 상황이 아니라 로마 천주교와 투쟁하는 자신들의 상황에서 바울을 읽은 결과, 바울이 비판한 유대교, 또는 유대주의자들을 (은혜와 함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한 로마 천주교의 원형으로 잘못 보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로마 천주교와의 투쟁을 바울 서신에 투사함으로써 잘못된 바울(a false Paul)을 만들어냈고,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도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1세기의 유대 상황에서 칭의 개념은 어떻게 개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속해 있는지를 종말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샌더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getting in)이 아니라 그 언약 안에 '머무는 것'(staying in)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도 어떻게 개인이 구원을 얻는가, 또는 어떻게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가는가에 관한 것일 수 없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의 이신칭의는 어떤 개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언약 공동체(교회) 안에 있음을 강조하는 교리다. 이런 점에서 이신칭의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교회론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또 놀랍게도 라이트는 이신칭의가 바울이 의미한 '그 복음'(the gospel)이 아니라고 역설하는데, 이것은 이신칭의를 바울 복음의 핵심으로 간주한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뒤엎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의미한 '그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Jesus Christ)의 선포다. 이신칭의란 단지 그 복음이 함축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종에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다.

새 관점 학파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살펴본 새 관점 학파, 특히 샌더스의 중요한 공헌은 유대 문헌 분석을 통해 제2 성전시대의 팔레스틴 유대교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을 중시한 종교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바울과 그의 서신들을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이 아니라 바울 당대의 상황에 비추어서 읽고 이신칭의의 사회적 차원에 주목한 점도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20세기 초에 독일 학자 브레데(William Wrede)가 이신칭의의 논쟁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이미 지적한 바 있으며, 새 관점 학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던의 신약학자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도 1960년대 초에 이신칭의를 이방인 선교라는 1세기 상황에서 이해할 것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샌더스를 포함한 새 관점 학파가 이신칭의의 사회적 차원에 주목한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공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관점 학파가 바울 이해와 관련해서 유대 신학의 중요성과 상황적 접근을 강조함으로써 ‘바울신학’의 배경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새 관점 학파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관의 문제

첫째, 새 관점 학파는 유대 문헌 분석에 근거하여 정립한 제2 성전 유대교 신학에 비추어서 바울 서신들을 읽고, 그것과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서신들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바울 서신을 유대 문헌에 종속시킨다. 또한 샌더스는 제2 성전 유대교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랍비 문헌, 외경, 쿰란 문서 등 유대 문헌들을 중요하게 취급한 반면 신약성경의 증거는 무시하였다. 이것은 새 관점 학파가 성경관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제2 성전 유대교에 대한 이해

둘째, 새 관점 학파는 1세기 유대교의 은혜의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위-의의 요소를 무시한다. 샌더스는 유대 문헌의 증거에 근거하여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규정하였으나, 오늘날 상당수의 학자들은 그의 유대 문헌 분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독일 성경학자 프리드리히 아베마리(Friedrich Avemarie)는 탈무드와 미드라쉬와 같은 랍비 문헌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개념, 즉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구원 개념과 선택에 근거한 구원 개념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랍비들이, 샌더스가 했던 방식으로, 행위에 근거한 구원 개념을 선택에 근거한 구원 개념에 종속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쿰란 문서와 외경에도 하나님의 선택과 자비에 대한 강한 강조와 행위에 따른 심판 개념이 함께 등장하여 서로 긴장을 이루고 있다.

또한 마크 엘리옷(Mark Elliott)은 위경 문서들과 쿰란 문서들을 검토한 뒤에 쿰란 공동체를 비롯한 다양한 유대교 분파들이, 모든 유대인은 자동적으로 언약에 속한다는 민족주의적 사상을 배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동료 유대인들 대다수를 언약 밖에 있는 배교자로 간주하였으며, 율법에 근거한 구별된 삶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남은 자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엘리옷의 주장이 옳다면, 제2 성전 유대교는 모든 유대인이 은혜로 선택되었다고 믿은 획일적인 은혜의 종교가 아니다.

1세기 팔레스틴 유대교에 강한 행위-의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 준수에 근거한 자기 의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다. 또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에서도 1세기 당시에 행위-의를 구원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회심하기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동료 유대인들이 행위에 의지하여 자기 의를 세우려 했음을 증언한다(롬 9:31-32; 10:3). 이러한 성경의 증거는 1세기 당시 유대교에 행위-의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팔레스틴 유대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은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유대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종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율법 준수를 언약적 약속들과 동등한 구원론적 요소로 간주했으며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Sirach 15:14-17; Psalms of Solomon 9:4-5; 2 Apocalypse of Baruch 54:15-19). 이것은 유대교의 구원론이 신인협력설에 근거한 이중적 구원론임을 뜻한다. 유대교의 이런 성격에 주목한 핀란드 신약학자 티모 에스콜라(Timo Eskola)는 제2 성전 유대교가 신인협력적 신율주의(synergistic nomism)였다고 옳게 주장한다.

인간의 철저한 타락과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낙관적인 인간론을 견지했을 뿐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유대교가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가르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그리스도중심적인 구원론을 주창하였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놓여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근본 원리이다. 게다가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어떻게 신인협력적 구원이 가능하겠는가?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의 문제

셋째, 바울 연구 분야에서 새 관점 학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이신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1세기의 유대인-이방인 문제와 관련하여 해석한 점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새 관점 학파는 이신칭의를 이방인 선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안디옥 사건 이후에 확립된 논쟁 교리나 선교 교리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새 관점 학파가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이신칭의는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사역 중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행한 설교에 등장한다(행 13:39). 이는 이신칭의가 후대에 확립된 교리가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 초기에 복음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레샴 메첸이 1920년대에 주장한 것처럼, 이방인 선교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가 정립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 때문에 이방인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을 주시고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심으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입증하셨다(행 10:1-11:18; 15:7-11). 이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분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받는다는 칭의 교리가 바울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뜻한다.

다음으로, 새 관점 학파는 바울의 이신칭의를 일방적으로 1세기의 유대인-이방인 문제와 결부시켜 이해함으로써 이 교리의 교회론적 의의를 크게 부각시킨 반면, 더 근본적인 구원론적 차원을 애써 무시한다. 로마서 1-5장의 논증에 근거할 때, 이신칭의의 근본적인 의미는 죄에도 불구하고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의의 신분을 부여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필요한 것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며 지킬 수도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단지 누가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문제, 즉 죄와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직 이러한 이신칭의의 근본적인 구원론의 틀 안에서만 이신칭의의 교회론적 의의(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어야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됨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비로소 그의 백성 안에 자리를 얻는 것이다.

맺는 말

이상에서 오늘날 바울 연구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새 관점 학파를 소개하고 그 학파의 공헌과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새 관점 학파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해서 긍정적인 점까지 무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제2 성전 유대교를 전적으로 은혜의 종교로 규정하는 새 관점 학파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유대교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을 중시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가 어느 정도 1세기의 유대인-이방인 문제와 관련이 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개인적인 무죄선언으로만 이신칭의를 해석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적절하게 보완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 연구와 관련해서 새 관점 학파의 긍정적 공헌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배우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 문헌 분석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전통적 견해를 배격하는 새 관점 학파의 학설을 면밀한 검토 없이 수용하는 것은 신학도의 바른 자세일 수 없다. 성도들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교회를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야 할 신학도들은 신대원 시절에 새로운 신학 이론과 학설을 평가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성경적・신학적 사고력과 분별력을 갖추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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