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배격하고 대한민국 수립 이끌어
“민족끼리 단결하자” 65개 정당운동협의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켜
美 군정과 협력ㆍ견제 속에 전국 순회 강연…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고려는 왕건(王建)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李成桂)의 나라’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대한민국은 분명 ‘이승만(李承晩)의 나라’다.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金日成)의 나라’다. 한동안 기승을 부린 ‘이승만 때리기’가 대한민국에 대한 원초적 부정이었고 최근 ‘대한민국의 재발견’이 이승만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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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24일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정부 수립식.(오른쪽)


이승만의 건국운동은 아놀드 토인비의 말 그대로 ‘도전과 응전’의 변증법 그 자체다. 1945년 8월 15일 70세의 노(老)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의 마운트 플리전트 2층 벽돌집에서 일제강점의 종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즉각 귀국을 위한 수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좌우합작에 우호적이던 미 국무부의 반대에 부딪혀 한동안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승만은 우리의 구상을 쉽게 따라줄 인물이 아니다”는 판단에서 국무부는 한동안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에 제동을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은 해방 2개월이 지난 10월16일에야 김포에 내릴 수 있었다. 순전한 ‘개인’ 자격의 환국이었다.

이승만이 부재(不在)하던 해방 직후 2개월은 말 그대로 ‘좌익(左翼)의 득세기’였다. 8월 16일부터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했고 9월 6일 박헌영(朴憲永)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즉 ‘인공(人共)’을 선포했다. 9월 14일에는 임의대로 내각 명단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이승만이 ‘주석’으로 추대돼 있었다. 대통령에 해당하는 자리다. 물론 이승만의 동의는 전혀 없었다.

‘주석 이승만’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심지어 북한이나 친북 성향의 학자들은 박헌영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사실을 들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그저 당시의 지명도를 바탕으로 백지 상태에서 내각을 구성할 때 이승만은 좌익에서조차 첫손 꼽지 않을 수 없는 비중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자연히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첫 번째 도전은 좌익 쪽에서 왔다. 귀국 다음날 여운형ㆍ허헌(許憲)ㆍ이강국(李康國) 등 좌익 인사들이 이승만의 숙소인 조선호텔로 찾아와 정식으로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언론에서 ‘민족의 영웅’ ‘최고의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던 이승만은 정중하게 주석 취임을 거절했다. 이승만은 태생적으로 좌익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워낙 좌익 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에 날을 세우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그렇다고 우익이 일치단결해서 이승만을 민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에게는 자기 세력이 없었다. 한민당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굳이 분류하자면 토착세력인 한민당보다는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 쪽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은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 가량 정국을 관망하던 이승만은 10월 23일 조선호텔로 전국 65개 정당·단체 대표 200여명을 모이도록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승만 이름 석 자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덮어놓고 뭉치자”고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건국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정당통일운동협의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를 발족했다.

일단 이승만은 ‘대통합’의 명분을 장악했다. 공산당 계열이나 임시정부 쪽에서는 불만이 없을 수 없었지만 거부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좌익과 임정의 도전에 대한 노회한 정치가 이승만의 첫 번째 응전이 바로 ‘독촉’이었고 그것은 대성공이었다. 명분 장악으로 그의 입지가 훨씬 넓어졌기 때문이다.

응전에 대한 재도전은 박헌영 쪽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10월 30일 박헌영은 ‘친일파 청산’을 통합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무조건 통합론과 조건부 통합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2주가 지난 11월 16일 독촉 탈퇴를 선언했다. 이승만의 구상에 약간 금이 가 버렸다.

이런 가운데 11월 23일 김구의 임정파가 역시 ‘개인’ 자격으로 김포에 내렸다. 이 날 저녁 이승만이 김구의 거처로 찾아갔고 다음날 이승만은 김구를 미 군정청장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과 김구의 묘한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12월 3일 오전 김구는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듯 숙소인 경교장에서 임정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승만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임정주미외교위원장, 즉 주미대사 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 군정청은 임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인공을 비롯한 어떤 단체도 정부로 인정치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놓고 있었다. 경교장 국무회의는 이런 미 군정청의 방침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였다. 이날 오후 임정 관계자들은 하지와 아놀드 군정장관을 방문해 임정의 지위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제적 승인 없이는 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정이 인정을 못 받는다면 족쇄가 될 수도 있는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자리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박헌영의 인공이나 김구의 임정이나 이승만의 독촉이나 ‘임의단체’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소 소강 상태를 보이던 정국은 12월 28일 미·영·소 3국 외상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쪽은 김구의 임정 세력이었다. 이 날 이승만은 신탁반대를 골자로 하는 성명서 한 장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지만 김구는 즉각 긴급국무위원회를 열어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했다. 해방정국에서 김구의 임정이 처음으로 주도권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날 우익진영의 신탁 배격 대표자대회가 열리는데 첫 번째 요구항목이 ‘신탁통치 배격’이 아니라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 요구’였다는 사실이다. 즉 임정세력은 다른 우파 진영을 끌어들여 반탁운동을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었다.

12월 31일 임정 내무부장(내무장관) 신익희(申翼熙)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이라는 포고문까지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무장력이던 경찰기구의 접수를 선언한 것이다. 미 군정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결국 다음해 1월 1일 하지는 김구에게 강력경고를 했고 김구도 한걸음 물러섰다. 1차 신탁반대운동은 이렇게 끝났다. 이 과정에서 12월 30일 한민당의 지도자 송진우(宋鎭禹)가 반탁노선을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1차 신탁반대운동에 대해 이승만은 소극적이었다. ‘반탁을 하되 반미나 미 군정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이 느닷없이 신탁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2차 신탁반대운동이었다. 이번에는 미 군정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좌우대립의 양상이었다. 한 달여 동안 계속된 반탁·친탁 투쟁은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은 반탁세력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이후 미 군정은 2월 14일 정부수립의 전 단계로 ‘남조선민주의원’이라는 기구를 창설한다. 우파인사들이 중심이 된 민주의원에서 이승만은 의장, 김규식(金奎植)은 부의장, 김구는 총리에 선임된다. 두 차례의 신탁반대운동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한 김구는 다시 실권을 이승만에게 넘기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미 군정의 하지로부터 왔다. 3월 20일 열리는 한국의 신탁문제를 다룰 미ㆍ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하지는 이승만을 의장직에서 하차시켰다. 불과 한 달 만이었다. 이유는 소련과의 협상에 확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미ㆍ소공위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지방유세에 나선다. 정치가 이승만의 탁월함은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미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명망에 ‘독촉’이라는 조직을 갖춘 이승만은 미 군정과의 관계가 좋지 않자 대중의 지지 획득을 위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선 것이다. 유명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읍 발언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공산당 배격’을 골자로 하는 정읍 발언이 나오자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남조선 민주민족전선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의 한독당까지 반발하고 나섰다. 한민당만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좌우가 극한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김구의 설 자리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이 무렵 이승만의 독촉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하나로 통합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발족하는데 이승만이 의장, 김구가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적어도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 투쟁에서 이승만은 유리한 고지를 확고히 했다.

이에 하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하나로 묶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이승만을 압박하려 했다. 당시 하지는 “이승만은 한국에서 탄생할 어떤 형태의 정부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당시 하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이승만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사실 하지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겠다고 했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권력과 원칙의 갈림길에 섰고 권력을 버리고 원칙을 택했다. 공산당과의 협력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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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한 농장에서 농기구를 들고 있는 이승만(가운데). 미국의 동포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 농장을 조성했다.1946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얻기 위해 도미(渡美)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실제로 이승만이 미국행에 나서는 것은 열흘이 지난 12월 4일이었다. 하지와 미 국무부의 방해공작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쿄에 있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12월 7일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21일까지 무려 4개월14일 동안이나 미국에 머물며 자신에 대한 지지세력 확보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사실 이승만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미국 행정부나 의회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3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소련과의 협력에서 반공노선으로 돌아서겠다는 선언이었다. 트루먼이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천운(天運)이었다. 4월 21일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더 이상 ‘떠날 때의 이승만’이 아니었다.

귀국 후 이승만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가 밝힌 구상은 ‘미 군정과 합작으로 보통선거법을 만들고 총선거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 정부를 유엔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추진해간다’는 것이었다.

한편 여전히 좌우합작, 미ㆍ소공위에 집착하고 있던 하지는 심지어 5월에 재개되는 미ㆍ소공위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을 2개월여 동안 가택연금해 버렸다. 그러나 하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ㆍ소공위가 궁극적으로 결렬될 경우 그 책임을 자신이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소(對蘇) 시각이 바뀐 것도 그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오죽했으면 하지는 설사 좌우합작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정권이 이승만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7월 1일 84세의 서재필(徐載弼)을 한국으로 데려왔겠는가. 당시 이승만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서재필이 하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재필이 아니라 서재필 할애비를 불러 봐라 되나” 하고 흥분했다고 한다. 물론 서재필은 대안이 될 수 없었고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내의 이런 정세와 달리 국제사회에서는 트루먼 독트린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은 9월 17일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했다. 미ㆍ소 점령지구에서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하되 이를 감시할 UN위원회를 두는 방안이었다. 이승만의 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8년 1월 8일 UN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군정을 해체하고 한국인에 의한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승만은 절대 환영했고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절대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련이 위원단의 입북을 반대하면서 남북한 동시 총선거는 불가능해졌다. 논란 끝에 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은 북한 측에 대해서는 인구비례에 따라 의석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국회의원 수는 남북 통틀어 200명으로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UN에 제출했다.

‘이승만 구상’은 순조로운 듯했다. 그런데 이 때 김구와 김규식이 단정(單政) 노선 반대를 명분으로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3월 12일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에게는 도전거리도 되지 않았다. 대세가 이미 이승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이 지나서야 두 사람을 비판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한 데서도 당시 이승만의 자신감을 알 수 있다. “좌익 파괴분자 외에는 기권할 사람이 몇 안 될 줄 믿는다.”

실제로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노당 계열이 총선반대를 명분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4월 19일 김구가 북한으로 갔고 얼마 후 김규식도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5월 5일 북한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5월 10일 95.5%의 투표율을 보이며 제헌국회 선거는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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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후 중앙청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사령관(오른쪽)의 모습이 보인다.

7월 17일 자신의 구상대로 대통령제를 관철시킨 헌법 제정이 이뤄졌고 3일 후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라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였다. 그 한 표는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을 찍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후 초대내각 조각(組閣)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일제에 의한 조선지배의 상징이던 중앙청 건물 앞 광장에서 자신의 지원자 맥아더와 견제자 하지가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국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해방 3년 만에 지구상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임정·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재미동포 청년들을 미군 특수부대에 파견하기도 2006101077061_00.jpg

▲ 1910년 6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이승만은 ‘준비된 국부(國父)’,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태어난 ‘건국의 아버지’다. 의외로 간단하다. 북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하면 통일조국의 아버지는 김일성이 되는 것이고 남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하면 이승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요, 현실의 문제다.

지금이야 마구 이승만이라고 부르지만 50대 이상에게는 ‘이승만 박사’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그는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능내에서 몰락한 선비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에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고종 12년 때였다. 3살 때 한양(서울)으로 이사와 지금의 서울역 근처 우수현(雩守峴)에서 스무 살까지 살았다. 그의 아호 우남(雩南)도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청년 이승만은 1894년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주시경은 한글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일찍부터 현실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2년 후 배재를 졸업한 이승만은 오늘날의 시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898년 3월 10일 제1차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웅변술로 열변을 토해 장안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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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복역중인 이승만.그러나 수구세력의 견제로 24살 때인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은 ‘역적모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다. 장장 5년7개월간의 옥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종신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승만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도서관을 만들고 영어사전을 집필했다.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심지어 함께 수감 중인 죄수 40여명을 기독교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또 1910년에야 출판되지만 옥중에 있으면서 자신의 근대화 구상을 담은 ‘독립정신’이라는 첫 번째 저서도 집필했다.

1904년 8월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의 밀서를 휴대한 채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길에 오른다. 어렵사리 시어도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힘없는 나라의 무명청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루스벨트가 아니었다. 밀사역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1905년 2월 윌버 학장과의 개인면담을 거쳐 조지 워싱턴대 2학년 2학기에 입학한 이승만은 2년 후인 1907년 6월 졸업한다. 귀국이냐, 공부냐를 고민하던 이승만은 9월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끝낸 이승만은 귀국을 원했으나 부친의 만류로 미국에 더 남게 되는 바람에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1910년 봄, 조국의 운명이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을 때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제목의 국제법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이승만 박사는 이후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거점은 하와이. 그곳에서 이승만 박사는 크게 세 가지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교육사업, 둘째는 교회활동, 셋째는 교민단체를 통한 독립운동이었다.

1918년 이승만 박사는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했고 하와이 동지회를 설립했다. 당시는 1차대전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가 높을 때여서 이승만 박사는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독립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1919년 조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다. 가상의 정부였지만 각료명단까지 발표됐다. 그것을 보면 당시 독립운동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5개 임시정부에서 각각 국무총리, 부도령(副都領·부통령), 국무총리, 집정관총재(대통령) 등으로 추대됐다.

 

이 중 법통은 이승만 박사를 집정관총재로 추대한 ‘한성정부’가 잇기로 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박사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우파에서도 이승만 박사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많았다. 사실 이승만 박사도 대통령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명칭을 활용해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 5년6개월의 임정 초대 대통령직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 것이다.

한동안 이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에도 암흑기가 찾아왔다. 1940년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한 그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폭로하는 저서를 집필했다. 그로서는 마지막 독립운동인 셈이었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이다. 이 책은 1941년 초 출간됐으나 처음에는 미국인들로부터 야유에 가까운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알래스카나 하와이를 공격할 수 있다”는 대목이 들어있는 이 책은 그 해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하루 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승만 박사는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소수나마 고국에 있는 동포에게 독립의 희망을 설파했고 미군과의 협동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OSS계획에 참여해 재미동포 청년들을 미군 특수부대에 파견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는 김구의 임시정부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수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군사적 기여를 해야 전후에 독립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됐고 치열한 정치투쟁 끝에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기쁨도 잠시,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고 3년 동안 전 국토는 초토화됐다. 이런 가운데도 이승만 박사는 특유의 외교력을 발휘해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독도를 넘보는 일본을 겨냥해 ‘이승만 라인(평화선)’도 선포했다.

사실 이승만 박사의 공(功)이 태산이라면 과(過)는 언덕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과도 커보였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다시 망명지 하와이로 떠나 말년을 보냈다. 1965년 90세의 이승만은 마침내 주검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언덕으로 태산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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