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주경신학 2013. 10. 7. 11:00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이승구 교수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만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 모든 삶의 국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살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북돋우기 위해서 우리네 한국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세속주의의 두 가지 양태를 생각해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고... 여겨진다.

 

1. 교회 안에 들어 온 세속주의의 현저한 양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나타날 때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우리 주변에 창궐하고 있는 아주 명확한 비도덕성과 비인격성, 물질 추구, 인간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루고 유지하려는 노력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노골적인 세속주의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또 때로는 이 세상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심각한 여러 형태의 현저한 죄악이 있고 불의가 있음을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에 대해 회개해야만 한다. 또한 교회 안에도 물질을 추구하며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교회가 존중되는 교회이며, 어떤 교우가 존중되는 교우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그 기준에 세상적인 것들이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교회가 매우 세속적이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교회 안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일을 하여 교묘한 정치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저한 세속주의이다. 개 교회에서의 인간 관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교단 안에서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교단에서나 교회들 간의 모임에서 어떤 이가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들의 교회가 세속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에 생각할 문제 보다는 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생각할 교묘한 세속주의의 양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그것을 세속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형태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2. 교회 안에 들어온 교묘한 세속주의

우리네 교회에 들어 와 있는 교묘한 세속주의란,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경향을 뜻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힘이 없을 때는 이와 같은 세속주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시작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숫자의 힘이나 우리들의 경제력이나 우리들의 정치적인 영향력 등을 무의식중에라도 의존하게 되기 쉽다.

 

아주 명확한 악에 대항하는 우리의 바른 노력에서도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이 나타나기 쉽다. 더구나 아주 명확한 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의 유익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 가운데서는 우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드러내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히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가 매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가장 교묘한 세속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든지,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나 구제 등과 같은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 의존하든지, 우리들이 체험한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면, 우리는 자신들이 전혀 세속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모르는 그 상태가 가장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상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세속주의의 형태인 것이다.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하는 것은 아무리 성경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성령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해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세속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십자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생각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힘에만 의존하려고 해야 한다. 적어도 고난 주간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아래서도 자신의 영광과 행복과 자신의 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나 본디오 빌라도, 또한 그들의 지시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 대던 유대 민중(오클로스)이나 빌라도의 지시대로 십자가 처형을 준비하고 그 일을 시행한 무자비한 로마 병정들과 같은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자행한 이들도 후에 복음 선포를 들은 후에는 “우리가 어찌할꼬?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과 우리 자신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복받음만을 추구해 간다면 그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기를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자기를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우리의 모든 것의 실질적 목표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 등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우리의 궁극적 실질적 목표로 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왕국을 구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실성을 분명히 말해 주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해석해 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부활의 빛에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사는 일의 유일하고도 충족한 기준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성경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의 다스림에만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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