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바로알기 연속기획](1) WCC 부산총회 앞둔 한국교회 방향과 전말

WCC/관상기도 2013. 10. 25. 17:55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WCC부산총회 앞둔 한국교회 방향과 전망

김길성 교수(총신대 부총장·통합대학원장)

 

2013년 06월 19일 (수) 11:56:23 김길성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WCC 이전 역사적 개혁주의로 돌아가자

한국교회 일치·연합운동 대표하지 못하는 WCC부산총회 반대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전통 따르는 성경적 에큐메니즘 천명해야

 

   
  ▲ 김길성 교수  
 

제10차 WCC 총회가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교회는 WCC 총회 부산 개최가 확정된 이후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예장합동을 비롯한 보수교단은 지금도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표방하는 WCC의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100만인 서명을 받아 WCC 총회에 보내기도 했다. 본지는 WCC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한국교회에 WCC의 성경관, 사회윤리, 사회참여, 종교다원주의 등을 상세히 게재하여 한국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WCC 부산총회 유치는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 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를 참석케 하였으나 상반된 보고서를 통해 WCC 신학의 방향 선회와 신학의 변절을 한국교회가 알게 되었다. 그 후 WCC 문제로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우리 총회는 WCC와는 완전 단절하였고,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통합측은 제3차(1961년), 제4차 총회(1968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김길창(NCCK 회장), 길진경(NCCK 총무),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WCC의 산하단체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성공회 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이들 교단 중 절반 이상이 한국교회 안에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고 나머지는 이에 동조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한국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 소요의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WCC는 1948년 화란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 이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제2차 총회,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3차 총회,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제4차 총회,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5차 총회,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제6차 총회,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총회, 1998년 짐바웨 하라레에서 제8차 총회, 2006년 브라질의 남부도시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제9차 총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가질 예정이다.


WCC 신학은 sola scrptura의 원리에 어긋난다

WCC 신학과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나, WCC를 있게 한 단체나 기구의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제4차 세계대회인 몬트리올회의(1963년) 보고서(제목: “성경, 전통, 전통들”)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의 전통(즉, 복음선포 kerygma의 전승 paradosis)에 의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한다(단락 제45번). 그러나 본래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전통(Tradition)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성경(Bible)은 말하자면 그것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되어진 전통(Tradition)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중요성은 성경과 전통이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들이 아니라는 인식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두 가지(성경과 전통)는 너무 얽혀 있어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권위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벗어난 주장이다. 이는 기록된 성경과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WCC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기초인 칭의교리에 어긋난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에서는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The Joint Declaration of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1999년)을 통해 칭의 문제에 관한 한 16세기에 있었던 상호정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고, 2006년에는 세계감리교협의회 제19차 총회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감리교회가 동의하였으며, 이를 WCC에서는 적극적으로 수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sola gatia),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sola fide) 도리를 선포한 종교개혁의 기치가 분명한데, 이제 와서 로마교회가 받아들인 칭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박형룡 박사가 평양신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로 문을 닫은 후에 중국에서 가르치다가 1947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 몸담았으나 1948년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온 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 됨을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 박사가 1951년 12월 25일 고신측 지도자들을 향해 호소한 말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그의 생각과 열망을 볼 수 있다.

 

출옥한 지도자들이여 우리 교회 전체의 회개의 지연함에 불만하여 당파를 이루어 교회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일이겠습니까? 교회전체의 회복갱신이란 원래 힘드는 일이요 일조일석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참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그들 속에 남아 있어 그들을 잘 권면하여 회개시키는 것이 출옥성도 여러분들의 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일치를 사모한 신학자였으나 장로교회가 WCC에 남아있을 것인가를 결정해야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이거나 끌려가는 것보다는 그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WCC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교회를 지도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WCC 부산총회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우리 총회는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시작한 평양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총신대학교는 올해로 112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노선을 취한 것은 총회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범 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우리 총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이후의 분열(1979년 개혁측, 1980년 개혁합신측) 후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과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외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1만 1000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WCC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요, 우리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따라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을 천명한다.


  이 지면은 총회WCC대책위원회(위원장:서기행 목사) 협조로 제작됩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