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교의학 2013. 12. 8. 03:19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은 ㆍ 2013-12-07 (토) 10:01 IP: 1.xxx.205 ㆍ조회: 30      

9부 교회
54장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490]..........................................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의 '교회’ kerk라는 단어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은 추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설교가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아의 나라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론적 개념이다. 그리고 또한 이 나라는 중생, 용서, 갱신을 통해 여기 지상에서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존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사람들의 교제보다는 훨씬 더 영적인 소유물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어린아이들의 소유이거나 소유가 되고, 하나님 나라 자체는 성령에 의한 평화, 기쁨, 즐거움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여기 지상에서 조직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유익들이 주어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지상 어느 곳에서도 마무리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특히 현세적 개념으로 직분들과 봉사들을 지니고 하나님의 회집한 백성으로서 가시적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유익들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하는 수단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과정에서 불순하고 사실상 교회에 속하지 않는(위선자들과 또한 신자들 가운데 있는 옛 사람) 온갖 요소들을 포함하는 반면, [영적] 소유물인 하나님 나라는 순수하고 순전하며 오직 거듭난 자들만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머리로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자기 백성의 왕으로 등장하고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되기 위함이다.(F.A. Philippi)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성경에 의하면 교회의 본질이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선택이 실현된 것으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고 의롭다고 하고 영화롭게 하며(롬8:28)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롬8:29) 거룩과 구원(엡1:4)을 위한 것이다............이 모든 것은 교회가 그 본질상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외적으로 교회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본질, 교회의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나 교회가 아니다............

[491]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견지하는 한, 교회의 개념은 다루기 곤란한 어려움을 낳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 언제나 신자들의 모임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 또는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래서 타락 전 아담과 하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에 아직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많은 신학자들이 천사들을 교회에 포함시킨다고 할지라도 천사들 역시 교회의 회원들로 여겨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물론 천사들의 주님이며 자기 십자가로 모든 것을, 천사들과 사람들도 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올바른 관계에 놓았다고 할지라도, 천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 않았고, 타락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모은 교회의 회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장 22절에 따르면, 신자들이 물론 천만 천사와 교제하지만, 이 천사들은 23절의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교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낙원의 약속 이후로 지금까지 지상에 살다가 조상들의 림보나 연옥이 아니라, 하늘에 취해진 모든 신자들이 교회에 속한다(히12:23).

현재 아직 지상에 사는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 속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또한 나중에 종말에 이르기까지 장차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자들도 교회에 속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렇게 가장 넓은 의미로 취해진다고 할지라도, 단지 상상으로만 존재하고 결코 실현되지 않는 플라톤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 실존의 보증을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작정, 은혜언약의 확실성, 그리스도의 중보자직, 성령의 약속 가운데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 회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낙원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수천 수백만 명이 이미 하늘로 취해졌고, 그들의 수효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증가되며(승리적 교회), 현재 아직 믿지 않거나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틀림없이 믿을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로 교회를 생각할 때,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지상에 사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전투적 교회)는 단지 교회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상의 교회와 과거와 미래의 교회와의 연계성을 확고히 붙드는 것은 좋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늘에 기록되고 언젠가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신부로서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될 자들의 한 모임, 한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전체의 이런 통일성을 견지하는 것은 일체감을 높여 주고, 용기를 북돋아 전투하도록 자극한다. 만일 우리가 더 나아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한정한다면(전투적 교회), 이것은 다시금 더 넓게 또는 더 좁게 취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 모든 교회,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현존하는(보편적 교회) 모든 신자들을 전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한 국가나 한 주(州)에 있는 신자들(행9:31)을 생각할 수 있으며(국가의, 주(州)의 교회), 또는 도시든 시골이든 특정한 지역의 신자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특정한, 지역 교회).

이런 맥락에서 ‘보편적 [또는] 국가적 교회’는 ‘특정한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체가 부분보다 앞서는 하나의 유기체다. 교회의 시작은 낙원이며(창3:15), 또한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이다(행1:8). 예루살렘 교회가 단독 교회로 존재하는 동안 보편적 교회,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였고,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 옆에 등장한 교회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의 설교를 통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여기까지 교회의 개념은 분명하고 선명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직면한다. 첫 번째 어려움은 성경에 이런 교회의 개념이 항상 불신자들도 포함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구체적인 특정 그룹들과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비록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렸다. 신약 교회에서도 훨씬 적은 정도라 하지만, 알곡 가운데 쭉정이와 곡식가운데 가라지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 시대 이후 교회들이 거듭 세속화 되고, 부패되고, 분리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교회 모두를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신학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항상 인정했고, 성경의 본을 따라 교회의 본질이 불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진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안에 있는 이런 불신자들의 현존을 쭉정이와 알곡이라는 성경적인 이미지, 또는 몸과 영혼, 외적인 사람과 내적인 사람, 몸 안에 있는 불신자들은 “나쁜 액체와 같다.”(In R. Seeberg) 스콜라 신학자들과 로마교 신학자들도 이와 같이 말했다.

예를 들어, 벨라미누스는 불신자들도 교회의 회원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R.F.R. Bellaminus), "단지 교회의 몸일 뿐, 교회의 영혼“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치고 만다. ”좋은 사람들은 교회의 내적인 부분이며, 나쁜 사람들은 외적인 부분이다.“ 불신자들은 ”단지 ‘외적인 연결’로 교회와 연관된 죽은 메마른 회원들“이다. 그들은 ”믿음의 고백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나, ”사악한 행실에 관한 한“ 마귀의 왕국에 속한다. 그들이 ”경건의 모양으로는 아들들이지만, 미덕들의 결핍으로 인해 낯선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 두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그룹이 존재한다.(R.F.R. Bellaminus) 그리고 [로마교 교리문답]은 전투적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성경에 의하면 그물 속에 나쁜 고기들, 밭에 있는 가라지와 타작 마당에 있는 쭉정이, 지혜로운 처녀들 가운데 있는 미련한 자들과 방주 안에 있는 부정한 동물들이라고 말한다.(Catechismus Romanus) 이것은 이론상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실재적으로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중세 말경에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로마교는 또한 외적으로 회원이 되는 것, 역사적 믿음, 교회의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조장한다.

종교개혁은 이런 견해를 반대했고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구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과 “보이지 않는 사랑의 결합에 의해 그들로부터 분리된 자들”에 대해 이미 말했었다.(Augustinus) 사실상 로마교는 이런 구별에 대해 그 어떤 반대도 할 수 없고, 로마교 자체가 한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 두 그룹”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이것을 수용한다. 벨라미누스는 “숨은 불신자들”을 취급하고(R.F.R. Bellaminus), 묄러는 루터가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로 이해하는 것을 칭송하고, 비가시적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의 담지자들이라고 말한다.(J.A. Mohler) 하지만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의 대부분은 거부되어야 하거나 최소한 교의학에서 논의되지 않는다. 교회가 비가시적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리스도가, 승리적 교회가 그리고 종말에 완성될 교회가 우리 눈에 현재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가 여러 장소와 많은 나라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핍박의 시기에 숨겨져 있거나 때때로 말씀과 성찬의 봉사가 중단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의 구별은 단지 전투적 교회에만 적용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 영적인 측면에 따라 또는 교회의 참된 회원들 안에서 비가시적이란 것을 가리킨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경우, 교회의 영적 측면과 참된 회원들은 하나로 합쳐져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다. 마음의 내적 믿음, 중생, 참된 회심, 그리스도와의 숨은 교제 등은 영적 소유물들로서, 자연적인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교회의 참된 형태를 부여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의 영적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오류가 없는 척도를 준 일이 없다. “교회는 가장 내밀한 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안다. 그러므로 알곡 가운데 쭉정이가 들어 있고, 참된 신자들 가운데 위선자들이 들어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한 언제나 가독교회 내에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전투적 교회,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에 대해 사용된 ‘교회’라는 명칭은 로마교와 개신교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은유적인 의미를 지난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핵심적인 요소를 형성하고 교회에 본질을 제공하는 신자들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전체가 부분에 따라 불린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며 그렇게 지속된다.

[492] 이렇게 이해할 때, 그 누구도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교회의 개념과 연관된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은 단지 은사적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제도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이 모임 자체는 단지 그리스도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봉사한다. 이것은 신자들의 모임이지만, 또한 신자들의 어머니이며, 유기체이지만 또한 제도적 기관이며, 목적과 동시에 수단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의 관계는 다음 장, ‘교회의 통치’에서 비로소 논의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개념은 묘사하기 힘들어서 국가 안에 있는 백성과 정부가 구분되어 따로 취급될 때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처럼, 신자들의 모임을 제도로서의 교회의 조직과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때 비로소 교회의 개념을 바르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F. Turretinus)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구별을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구별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슬며시 후자에 속하지 않는 의미를 후자에 부여한다. 한편으로 교회를 단지 그 관념이나 승리적 교회만이 아니라, 또한 지상의 전투적 교회에 따라 ‘예정된 자들이나 선택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위클리프), 또는 ‘완전한 자들’의 모임으로(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펠라기우스, 칼빈에 의하면 재세례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 또는 ‘한 번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으로(노바티아누스), 또는 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성찬에 참여하는 교회 회원들(성찬을 받는 자들)의 모임으로 묘사하는 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 교회의 무게중심을 신자들의 모임에서 계급적 제도, ‘온 세상의 외적인 최고 군주제’로 옮기고, 교회의 본질을 ‘듣는 교회’보다는 훨씬 더 ‘가르치는 교회’에서 찾는 로마교가 있다.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을 최소한 어느 정도 참된 회원들로 견지하기 위해, 교회를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멜랑흐톤, 뢰에, 클리포트 등), 또는 세례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뮌히마이어, 델리취, 필마르 등) 묘사하는 모든 자들이 이 방향에서 출발한다.

이 두 견해들은 일방적이어서 교회의 본질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 351~360p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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