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를 올바로 하려면

 

 이종연 목사(진명교회)

 

 

널려있는 게 신학교인 때이다. 좋은 일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저마다 최고라고 선전하여 학생을 끌어 모으려고 혈안이다. 인가는 받았는데, 합법으로 문은 열었는데 학생을 채우려니 공급이 딸리는 현상이다. 이른바 이름난 몇몇 곳이야 그런대로 운영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불법이나 불건전하게 꾸려가게 된다.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배운다면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세상나라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교회에서 신학교를 인가받게 되면서 타락하게 된다. 교육부에서 보더라도 신학교가 독립하여 딱뿌러지게 운영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인가를 받고도 부실하게 운영하는 판국이니 어찌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가? 신학교라는 특수학교에서 본보기를 보임으로 세상학교들이 건전하고 투명하고 내실있게 나아가도록 해야하는데, 오히려 세상학교의 썩어빠진 수법을 도입하기에 바쁜 형국이니 어쩌랴! 세상제도나 세상학위과정을 무조건 불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신학교라면 세상을 뛰어넘는 운영을 통하여 실력과 인격을 갖추도록 하면서 성경대로 바른 신학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왜 세상과 야합하고 세상버릇 따르기에 헐떡거리고, 신학교가 무슨 출세하는 지름길이라도 되는 양 너무도 세속화에 물들어있다. 이런 부패상 가운데 신학교를 바르게 선택하고, 신학공부를 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상식이고 기본에 속한 것을 여기서는 이야기하려고 한다. 귀기울여보시라!

 

 

신학교의 전면 개혁에 대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신학공부를 놓고 관련된 제도와 운영에 대한 것은 조금만 건드리려고 한다. "신학공부" 란 참으로 값어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해내는 공부는 아니다. 대량생산을 하거나 졸속으로 이루어지는 분야가 아니다. 더욱이 돈벌이나 명예 따위와 도무지 상관 없는 길이다. 대형목회니, 박사니, 교수니, 선교니, 꿈꾸는 공부가 도무지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들은 풍월을 따라서, 전례를 좇아서, 잘 모르고 야망을 이루어보려고, 그저 목사만 되면 장땡으로 알고 대부분 신학공부에 덤벼든다. 과연 그러한지 따져보자. 제가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날 모든 품속이 단박에 들어나리라. 왜 신학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이런 물음에 저마다 거품을 물고 서원이니, 소명의식이니, 계시를 받아서...많은 말을 앞장세우면서 기세등등하리라. 하지만 먼저 짚어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부터 차분하게 냉정하게 공정하게 철저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신학교의 문턱은 교회의 문턱에 붙어다닌다. 빗나가는 교회가 많아지고 거짓교회가 정통을 가장한 때인지라 참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고 신학공부를 생각한다면 아예 그만두시라. 명퇴하고 노후를 대비하는 차원으로 두드린다면 빨리 정신차리시라. 속성과정을 거쳐서 의식주의 필요를 채우고 자칫 대박이라도 노린다면 망하는 길이다. 세상나라에도 무수한 대학이 만들어지고 문닫고, 부실하게 운영하면서 카르텔을 형성하여, 학교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 실정이다! 육영사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돈벌이 하는 곳으로 자꾸만 망가진다.   

 

 

 이런 판국에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정말이지 마음을 가다듬고, 두 눈을 부릅뜨고, 건전한 판단력으로 날카롭게 따져야만 한다. 분석하고 살필 자료와 능력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 거짓 정보로는 불가능하고, 식견은 객관이고 상식에 굳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이 어떤지 성경과 개혁교리의 잣대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해도 머리로만 신학공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라온 환경과 시대의 풍조 따위로 잔머리 굴리는 기회주의자들이 많은데 신학공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사람들이 아니리라. 교회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봉사도 좀 열심히 하고, 때로는 사업이 망하거나 무거운 질병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신학공부를 하라고 자천타천 부추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섭리 가운데 이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신학공부를 생각하면 안 된다. 신학공부란 최고학문이고, 오랫동안 해야 하며, 객관의 잣대에 비추어 갈수록 검증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오늘날 신학교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다! 유유상종이라고 끼리끼리 모여서 웅성거린다. 상식이하도 부지기수이다. 학문의 기본도 대부분 무시한다. 말로는 박사들이 그럴싸한 소리를 해도 알맹이는 대부분 없다. 하나님 것으로 신학공부를 하는데, 시간이며 돈이며 건강이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썼는지 뒷날 직고해야만 한다. 그냥 마구잡이로 해치운다고 능사가 아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도 안 되고, 심지어 스스로 속아서 귀한 인생을 허망하게 만들어도 안된다.

  

할 말은 참 많은데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에 주력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신학공부를 하게하신다면, 어떻게 함으로 그 사실을 증거할 것인지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성경에서 철저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여러 잣대를 놓고 따져보아야 한다. 이런 두 부분을 가감 없이 알아보고야 비로소 신학공부의 자격이 주어진다. 바른 구원의 신앙으로 교회관과 성경관을 올바로 갖추도록 그런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야만 한다. 오늘날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성경관과 교회관이 갈수록 흐려진다. 바른 신학교를 만나서 제대로 공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도 바른 교회에 속하여 세례도 받고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라야 한다. 속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올바로 알기는 쉽지 않다. 이미 눈이 한 쪽으로 쏠려서 상대주의로 만들어지기 쉬운지라 여간해서 바른 신학공부를 하기란 만만치 않다. 더욱이 개혁신학이라는 가장 올바른 신학을 배우려면 참 잘 살펴야 한다. 게다가 신학교마다 개혁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니 더더욱 긴장해야만 한다. 제도권의 학위를 정상으로 배제하는 곳도 있고, 수준에 미달하니까 무조건 세상제도를 반대하는 곳도 있으니 이 양면을 고려해야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안에, 신학교 안에 세상 것으로 싸서 꾸미는 풍조가 만연한다. 제도니 학위니 부터해서 운영과 학사에도 인본주의와 비 성경의 물결이 출렁인다. 한심하고도 끔찍하다. 신학공부나 제대로 가르치고 배운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속이 썩었고 동기가 잘못인데 무슨 신학공부를 기대한단 말인가?                

        

 

왜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가? 울 일인지 웃을 일인지 모르겠다. 신학교들 내부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너무 복잡하고 교묘한 구석이 많다. 쉽게 빨리 좋게 장래를 보장하는 공부를 강조한다. 어차피 큰 교단에서는 한 세대만 지나도 물갈이가 되는 형편이니 일자리는 많다. 군소교단은 이에 맞서려니 설움도 있고 현실에서 한계도 있으니 때로는 필사적이다. 한마디로 세상사랑 가운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설치고, 말세의 증상인 돈사랑, 자기사랑 따위에 물들어서 신학교의 몰골이란 참으로 비참하고 앙상하고 흉악하다. 지극히 소수의 신학교만 그래도 바로 해보려고 하는데 눈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올바르다면 신학공부를 많은 이가 해도 좋겠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데 성령님이 이끌어 정상으로 가르치고 배우지 못한다면 이미 강도로 만들어진다. 진리를 올바로 정상으로 연마해도 만만치 않은 것인데 어찌 지금처럼 운영해서 참 일꾼이 길러지겠는가? 신학공부의 기본은 무엇이고, 교회와 관계는 어떻게 되며, 목사란 무엇인가 따위를 뚜렷하게 알아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가짜들이 진짜로 행세한다. 거짓 선생은 늘 수북하다. 오히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낸다. 여기에 세상은 손뼉치면서 맞장구친다. 하루아침에 믿고 끝도 없이 한 교회나 몇 교회가 모여서 교단을 만들고 노회를 만들고 연합회를 만들어 신학교를 만든다. 미끼를 내놓고 앞날의 청사진을 보여주니 할 일 없는 많은 사람이 기웃거린다. 대충대충 만들어진다. 여성안수가 대세로 굳어진 때이니 수입원은 넘친다. 박사라는 이들이 뒷받침하여 사업은 겉보기에 욱일승천이라. 과연 그런가?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사탄의 전술이란 좋은 제도나 좋은 말이나 좋은 틀거리를 언제나 교묘하게 역이용한다. 앞세운다. 그래서 신학공부의 원리를 내용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무척 조심스럽다. 양의 탈을 쓰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기도 하니 분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아는 만큼 분명하게 알려드리려고 한다. 신학교가 무엇이고, 신학공부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안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신학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올바른지 말하려고 한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두 가지로 압축한다. 성경과 교리라는 두 방면을 철저하게 공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리가 없는 신학공부는 없다! 교리를 넘어서는 신학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교리를 해명하고 세우는 신학이라야 한다. 그것을 더욱 확고하게 검증하고 심판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성경해석학 분야도 이미 엉터리가 주름잡는다. 교리가 약해진다면 성경해석이 빗나간다는 말이다. 성경을 삐딱하게 받으니 교리를 조롱한다. 성경이 무엇인지 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가르치고 배워야 하다. 요즘은 쓸데없는 과목들이 쳐들어와서 정통과목을 요식행위로 해치운다. 이러다 보니 신학공부 과정에서 인간성이 망가진다. 믿음이 망가진다.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 경우로 전락한다. 성경에 관련한 기본 가르침과 교리에 관련한 기본 가르침에는 어떤게 있고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기본 원리와 연장을 갖추도록 첫 걸음부터 확실하게 해야 한다. 바쁘다는 구실로 현실의 요구를 앞세워서, 학제에 밀려서 신학공부의 기본을 무시한다면 삯꾼은 시간 문제이다. 아! 성경과 교리에 관한 공부를 올바로 가르치는 신학교가 기다려진다...  

 

 

 신학사를 돌아보더라도, 정통신학교에서는 잡다하게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거짓 과목을 내세운다거나 기본공부를 갖추는데 소홀히 여긴 적이 없다. 이런 틀을 무시하면 타락한다. 거짓을 가르친다. 외식한다. 마침내 교회가 부패하고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무엇이 정통신학교이고 정통 신학공부인지 알면 된다. 교리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설명할 수 있다. 개인이 세례를 앞두고 배우고 확인하는 잣대로도 쓰이고, 신학의 울타리 구실도 하며, 성경을 성경으로 알도록 잣대 구실도 해준다. 믿는 사람이나 교회는 저마다 교리가 있다. 신앙고백이 있다. 그러니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는지는 신학공부에 절대이다. 교리와 신학이 다르면 안 된다. 교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은 이미 바른 신학이 아니다. 아니 신학 조차 아니다. 교리 가운데 정통교리를 우리는 개혁파 교리라고 부른다.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생각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개혁교리를 받는다고 하는 수도 있으니 경계할 일이다. 교리를 올바로 알고 배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성경으로 확인한 교리[교회의 가르침]을 간직해야 한다. 말로만 이단 삼단 하지 말고 성경으로 확증된 교리를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생명의 양식으로 철처하게 우리 인격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교리라야 한다. 말쟁이가 돼서 사변주의가 된다거나 세속철학이나 학문의 방도 정도로 교리를 다룬다면 끝장이다. 무엇보다 교회에 내리신 성령님의 선물로서 거룩한 교회가 이제껏 지나오면서 성도들의 피로 물들어있는 가르침이 교리이다. 사사로움이란 있을 곳이 없다! 무질서와 더러움과 권모술수와 무지, 불경건과 배은망덕이 교리의 세계에는 없다!   

 

 

 교리를 대할 적에 제대로 알고 배우려면 쟝 깔뱅을 아는 것은 거의 절대이리라. 개혁교리란 성경에서 비롯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지만 그 가운데 교회역사에서 보면 깔뱅이라는 스승을 올바로 알아야만 한다. 그가 쓴 글을 가르친 내용을 직접 읽어내야만 한다. 현대 조직신학에서는 이 방면에 큰 문제가 있다. 원래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교의[신]학이라는 말이 맞다. 조직신학도 같은 뜻으로 쓰면 가능하지만 지금은 변질된 이름이다! 그러다보니 교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치지 못하고 성경을 중점으로 가르치는 주경신학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아무튼 깔뱅의 교리체계를 힘입어야만 바른 교리공부를 한다. 깔뱅을 저마다 정통했다고 써먹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보기를 들어서, 깔뱅의 글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성경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고, 성경을 원어로 독파할 능력과 실제를 지녀야 한다. 그리고 라틴어와 프랑스말로 그의 글을 읽어야 한다. 게다가 인문과학의 기초분야에 대한 학문의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야 비로소 깔뱅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런 깔뱅주의자가 얼마나 있을까? 참으로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다. 교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공부의 한 축인데 깔뱅을 알아야만 교리를 바로 안다. 깔뱅을 어중이 떠중이들이 울궈먹고 그의 작품들을 번역한다고 떠들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방면에 할일이 무척 많으니 좋은 일꾼들이 바른 신학교에서 길러지기를 고대한다. 그의 작품 전집을 좋은 우리말로써 번역해야 한다. 이 작업이 돼야 교리공부를 풍성하게 거룩하게 한다.           

 

 

흔히 교리 하면 영미 계통 교리인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인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정치조례, 예배모범을 떠올린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나온 개혁교리인 벨직 하이델비르흐 도르트뤠히트 같은 것을 먼저 디디고 서야만 교리를 올바로 배운다. 그저 한 학기 눈요기로 가르치고 배운다면 엉터리이다. 물론 다른 과목도 배워야 하는 한계를 지닐지라도 한살매를 두고 교리를 공부하는 원리를 방법을 목적을 전수받아야만 한다. 신학을 마치고 강단에서 교리를 무시하고 규모없이 헛소리하는 시대 아닌가? 교리가 없다면 무시하고 비뚜로 가르친다면 교회가 아니다. 성경을 모른다는 증거이다.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기에 교리를 멀리한다. 배교로 돌아서기에 교리를 짓밟는다. 쓸데없는 과목들을 배우려 들지 말고, 교리사부터 시작하여 기독교강요와 개혁교리 문서 자체를 깊이 공부해야 한다. 그대로 가르치는 교회를 세워야하고 그 가르침 대로 성령님이 이끄시는 거룩한 삶을 강력하게 펼쳐야 한다. 교리를 어렵다고 한다거나, 유행에 뒤쳐진다고 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면 교회가 커지지 않는다는 따위는 말도 되지 않는다. 누가 교리를 어떻게 가르치는가는 그래서도 중요하다. 교회를 교리를 따라서 세우는 선생이 반드시 맡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신학공부에서 중요한 두 방면 중 하나인 교리공부를 말하는 중이다. 교리공부에서 사변으로 지식욕에 빠지는 것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반드시 성경으로 결론나야 한다. 교리의 칼날로 참과 거짓을 갈라내고 순수한 교회를 세우도록 공부한다.        

 

  

교리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니 중단하고, 이제 신학공부에서 근본으로 중요한 성경공부를 다룬다. 어느 과목을 다루던 신학공부에서 성경은 으뜸이고 온통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다시금 힘주지만 성경을 빙자하는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요즘 교회강단에서 자마다 성경 대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인가? 성경 대로 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결국 성경관에 문제가 있고 신학공부에서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결과이리라. 그러면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메꾸게 된다. 성경을 빙자하여 매꾸니 얼른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그저 학교사업 종교사업으로 뒤바뀌어 거기에 사로잡혀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신학공부를 한다. 이건 성경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리관이 바르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교리와 성경은 함께 간다. 성경을 읽고 다른 소리하는 것은 이미 비꾸러진 강단이다. 교리주의에 빠지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아리송해진다. 성경 자체가 교리의 성격을 지닌다. 계시의 속성을 생각해보더라도 성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는 상식이다. 어떤 연장을 마련해야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지 알아야 한다. 그저 지금 한글성경만 놓고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 식이면 곤란하다. 무식주의는 지식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제 형편과 처지를 내세워 스리 슬쩍 넘어가려는 짓을 언제나 조심하고 물리치자. 성경공부할 연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다른 소리를 배운다. 결국 인본주의로 빠뜨린다. 사람의 편리주의로 거짓선생이 만들어진다.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닌 걸 알아야 한다. 수준미달로 사실 성경을 다를 능력을 없는 가짜가 넘친다. 가짜가 진짜를 물리치는 때이다. 교인들도 대부분 가짜 소리에 길들여져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신학공부에서 한 축인 성경공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심해야 한다. 올바로 이루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공부하려면 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원어로 성경을 독파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이다. 적당히 학점이수 정도로 때우려면 신학공부가 아니다. 심은 대로 반드시 거두리라! 말씀을 가르칠 때 선포할 때 원어성경으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은 기초이다. 이것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개혁교회는 없다! 교리가 힘을 쓰지 못한다. 교리의 본령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니 교의학을 힘쓴다면 주경학에도 정통으로 힘쓴다. 조심할 일은 교리에 분명하지 않은 성경원어공부란 하나마나 이고 더욱 망가지기 쉽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원어를 강조하는 단체 치고 정통교리에 충실한 경우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렵다. 바른 신학공부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그 본문을 놀혹 신학공부를 해야할 정도가 된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꿈같은 이야기이리라. 첫 술에 배부르지 않을지라도 이것을 구현하는 학교라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대부분 요식행위로 형식치레하여 원어를 가르친다. 배운다. 그나마 양심이 꺼거리는 사람은 원어마련에 늘 고심한다. 성경원어공부는 신학의 다른 과목을 공부하기 전에 필수로 연마해야 할 공부이다.  

 

 

지금도 원어를 강조한다는 신학교나 세상에 강습소들을 보면 하나 같다. 돈벌이 이고 겉꾸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 같이 개혁교리를 깔고 가르치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성경을 가르치고 강조한다면서 교리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길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원어성경도 엉터리라는 것을 증거한다. 차라리 이런 데서 배우면 안 된다. 성경을 올바로 배우는 방편의 하나로 언어를 준비하며 원어성경도 보는 것인데, 먼저 근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면 성령님이 진리 가운데로 이끄는 연장으로 쓰시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 사이에 원어에 능통한다고 해도 쓰레기보다 못하리라. 그런데 원어를 배웠다는 시늉을 교인들과 신학생들과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한다면 화있을찐저! 칠판에 원어 하나 그려놓고 어설프게 발음 한다고 권위가 생기고 가르치는 과목에 능력이 생기는가? 그저 낱말 하나 어떻게 덧붙인다구 성경해석이 강력해지는가? 저마다 원어에 대가라고 신학교에서는 날뛰고, 그런데 맛 조차 보지 못한 다른 동료들은 눈만 꾸벅거린다. 참으로 해괴망측 하고 우습다. 신학을 하는데 누구에게서 어떻게 배웠는지는 일평생 따라 다닌다! 철저하게 원어를 가르치는 학교라야 한다. 적어도 보통 영어성경을 보고 읽고 이해하고 다루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다룰 정도로 배워야 마련했다고 본다. 또 그런 사람이 원어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 나라에 이런 선생이 몇이나 있을까? 게다가 바른 선생이라면 교리학까지 정통해야 하는데 이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격이리라. 그마만큼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기 쉽지 않다.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우리는 신학공부를 배우는 것을 조금 다루었다. 귀한 마음으로 바른 결단을 내린 분들이라면 앞에 말한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 길을 찾으시라!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가사 배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리와 성경을 이렇게 가르치고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학교랑 그런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이렇게 마련해야 바른 일꾼이 된답니다.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배운 대로 나온다고 유행을 따라다니다가 비참하게 마치게 됩니다. 정말 부르심이 분명하다면 이렇게 교리학과 주경학을 중심에 놓고 공부합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공부이기에 첫걸음부터 철저하게 시작하십시오. 중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고 언제고 그 버릇은 나오고야 맙니다. 교회를, 사역을 밥벌이로 여기지 말고, 신분상승의 기회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를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나 눈여겨보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신학공부를 마련하십시오. 구체적으로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데 온힘을 쏟을 때, 성경원어와 깔뱅의 모든 작품들을 섭렵해야만 합니다. 이 두 방면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신학교라야 올바릅니다. 그래야 개혁교리를 바탕 삼아 바른 교회를 세우는데 마땅한 일꾼이 되도록 만드실 겁니다. 소문난 신학교와 소문난 박사들이 널려있는 때이기에, 그에 상응하는 달콤한 미끼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기에 만만치 않습니다. 바르게 판단하여 가는 길은 아마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좁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왕 하도록 하신다면 어찌 정통으로 공부하는 길을 마다하겠습니까? 휙 다가왔다가 이내 사라지는 이 고비를 잊지 마십시오!

       

 

* 교회와 신앙

 

출처: 좁은길을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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