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보다 그리스도를! / 윤석준 목사

 

 

 

마르틴 루터가 ‘모든 성자들의 날’(만성절)을 코앞에 두고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루터가 비록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우리에게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중세야말로 ‘기념일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달력에 빈틈이 없을 정도의 기념일들이 가득했던 시대였는데, 그 대부분이 성자숭배와 관련되어 있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실 이 ‘기념일들의 시대’를 종식시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된 교회들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퍼포먼스가 중심이 된 교회는 언제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외형적 보임’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날, 혹은 절기와 관하여도, 실제 그 날과 절기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그 날이 주는 파워, 그 날이 주는 선동(煽動)성에 더 가치를 두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는지 늘 유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절기에 대해 “너희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거니와”(8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신 바도 된 입장에서,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느냐?”(9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의 무익함”(10-11절)을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날의 선동성에 치중하는 것, 퍼포먼스적 교회가 되는 것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성령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은 성령님께서 바울 선생님을 통해 전한 복음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 때문에 망쳐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대단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따라 올곧은 교회의 풍토를 세우기를 원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점에서 성탄절에 관하여도 아주 신중한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루터는 단번에 모든 축일들을 없애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주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기념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칼빈 역시 이 ‘날들을 폐지하려는 시도’에 동의했습니다. 칼빈은 성탄절에 특별히 모여 예배하는 것보다 그저 12월 25일 이전 ‘주일에’ 성탄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특별한 어떤 날보다 ‘주일’에 진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1574년 도르트총회는 성탄절을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총회는 사람들이 주일로 만족하기를 원했고, 특별한 날 대신 12월 25일 이전 주일에 성탄에 관해 설교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크게 경축하는 것이 성경적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성탄절을 없애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그것이 존속된 이유는 목사들의 권고와는 달리 도시 내의 권력자들이 시민들을 위해 축제일을 공휴일로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제일 처음 제정되게 된 역사적 내력을 보아도,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성탄절을 기념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4세기가 되어서야 교회 안에 축제일로서 이 성탄절이 성대하게 기념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역사 속에서 흘러 떠내려가듯이 풍조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풍조가 올곧은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이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절기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몇 가지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를 강조하는 것은 ‘마치 그 날에만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을 희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들에서 절기란 항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전혀 관계없는 절기들(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추수감사주일 등)이 절기로써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사실상 절기라는 것은 일 년의 달력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점진적으로 그려나가는 추상화(抽象畵)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성탄절’에만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늘 태어나시며, ‘부활절’에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늘 부활하십니다. 신자들의 삶 속, 교회의 구체화된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사역을 계속해서 펼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절기이며, 따라서 절기는 일 년 전체, 교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어야지, 그것이 특정 날에만 기념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기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이 사실을 망쳐버립니다. 성탄절에만 그리스도의 나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입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자의 삶 매일에서 묵상되어야 하며, 매 주일 설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역시 고난주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금식할 때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부활절 주일예배의 칸타타 속에서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시마다 신자들의 삶을 주관하는 근본적인 힘과 태동이 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5주일 37문답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주간에만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신 모든 기간에 고난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마치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 시점에만 있었던 것처럼 여겨, 특정 날들에, 특정 시기들에만 국한하여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 구속사역이 교회 전체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성탄, 즉 성육신 역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시점에만 기억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탄은 기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절기에 대한 강조가 비본질적인 것을 향한 치중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주일학교 아이들과 중고등부, 대학부 아이들에게 부활절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일관된 대답은 ‘계란’이 생각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스개로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 부활의 정수(精髓)를 내면적, 본질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외양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가르쳤기 때문에, 부활절에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를 죄로부터 구속하고 계시다는 사실, 곧 나의 삶이 새로운 국면, 죄를 극복한 삶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계란이 더 각인된 것입니다.

 

성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탄절에 산타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너나 할 것 없이 성탄절이 되면 예배당 바깥쪽에 빛나는 전구들로 치장을 하는 것, 예배당 안에는 트리로 장식을 하는 것, 도시마다 광장에 교회들이 연합하여 대형 조명트리를 세우는 것을 마치 무슨 사명인양 치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부활절이 ‘계란의 날’이 되는 것보다 성탄절이 ‘산타’와 ‘트리’의 날이 되는 것을 덜 조장하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성탄에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의미를 깊이 있게 가르치고 묵상하고 있으며, 단지 퍼포먼스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탄에 대한 깊은 의미들에 대한 이해가 자리하도록 애쓰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성탄은 시끌벅적한 전야제 행사들(춤, 노래, 연극과 공연들)과 중고대 학생들의 밤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형 쇼핑센터들이 뜬금없이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세속화의 현장 속에서, 교회라도 쇼핑센터 같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까?

 

절기의 외면적 강조는 항상 본질적인 것(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치중을 약화시키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치중을 강화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껍데기를 자꾸 세우는 것에서 탈출하여 조금 더 그리스도의 본연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탄절이라는 절기가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날에만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억한다는 것과, 이 날을 복음의 본질이 아닌, 행사와 트리와 밤샘의 날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교회가 기념하는 것을 없애버리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절기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한 걸음씩만이라도 전진합시다. 비록 지금 우리의 성탄절 모습이 중세 성자들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들과 닮아 있다고 할지라도, 한 목사, 한 성도, 한 회중이 변화를 취하려고 할 때 ‘우리’가 변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거창한’ 성탄을 만들지 맙시다. ‘소박하고 절제된’ 성탄을 보내도록 합시다. 주님은 왕궁이 아니라 구유에 태어나셨으며, 초라한 옷을 입었던 어부 베드로에게 금으로 된 왕관을 씌우고 금홀을 들리고 비단 옷을 입힌 것은 타락한 교회였습니다.

 

성탄은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절기보다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퍼포먼스보다 성육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들 속에 이런 일치된 보편적 의식들이 뿌리내리기만 한다면, 고신교회들은 다른 교회들과는 참 다른 성탄을 보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글·윤석준 목사 /부산에서 유은교회를 개척해 5년째 이상적 개혁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http://www.knews.or.kr/news/view.html?section=79&category=86&page=2&no=5407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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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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