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대장쟁이
[욥기 6: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실로 엄위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저 세상종교의 한 종류로, 혹은 사상(思想)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마저도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심판하실 것을 안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한 일마저 해치울 정도로 타락한 오늘날입니다. 교회에서마저 ‘경외(敬畏)가 실종되고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도 않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아무런 역사나 기적이나 증거나 체험도 없고,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소리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계시는 증거가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그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싸움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나 방언보다도, 성령충만보다도, 어떠한 신앙생활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욥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이 한 주일동안 욥의 곁에 앉았다가 드디어 욥의 고난을 놓고 토론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욥이 탄식하며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토론의 첫 번째 주제가 “경외”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욥이 탄식한 그 탄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생에 대한 저주.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것으로라도, 아무리 짧게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존재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 설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하고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3장 26절,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고통” 때문입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그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두 번이나 사단에게 자랑하신 자입니다. 욥 또한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두 번이나 그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적신으로 나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나님이 복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뇨?”고 말한 욥입니다. 그러나 그 욥도 완전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만일 욥이 완전하였더라면 어떠한 고난, 고통도 그를 흔들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도 한계성을 가진, 극심한 고난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욥의 탄식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참소하는 자의 공격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지적합니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히브리어 '라아'; ‘싫증이 나겠느냐?’) 염증이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쉽게 말하자면 “야, 도저히 못 참겠네. 보자보자 하니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구나. 내가 한 마디 안 하고는 안 되겠구나.” 그러고는 공격이 시작됩니다.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그래, 남은 잘 가르치더니만 너 자신은 그게 뭐냐?” 참으로 약점을 찌르는 아픈 지적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더니, 그것이 너의 모든 것이라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날립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이 남모르게 죄를 범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에 의한 단죄요 정죄입니다. 욥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사실은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지적이 욥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벌어지는 시대입니다. 진실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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