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 오직 교회?

개혁주의 자료 2014. 4. 4. 10:39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vs Sola Ecclesia,,,

흔히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있었던 형식규범을 꼽아보세요, 라고 질문하면 "오직 성경" 혹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격언을 취한다.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질적인 내용을 견고하게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직 성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웠을 때, 그 반대편에 “오직 교회”라는 명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 진의가 파묻히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오직 교회”라는 명제는 중세의 교회적 삶의 근간을 보여주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중세교회는 “오직 교회”의 원리 아래 다스려졌다. 키프리아누스를 통해서 적어도 이단들과 유사기독교가 출몰하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는 합당하게 강화되기 시작한 감독직의 기능이, 10세기를 넘어서면서 교황권의 강화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교회 인식이 나타나는데, 교회의 본질을 정의할 때 회중을 소외시키고 일차적으로 직분자에게서 파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덧 교회라는 말을 쓸 때, 자연스러이 이원화된 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훈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교훈받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교회를 구분했는데, 전자가 직분자이고, 후자가 평신도들이다. 이 둘의 관계는 계급적이어서, 직분자가 높은 질서를 점유하며 동시에 본질적인 요소이고 평신도는 낮은 질서를 차지하며 이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는 교훈하는 교회에 7성례를 귀속시켰다. 세례성사로부터 종부성사에 이르는 일체의 신앙의 과정에, 쉽게 말하여 신앙에 입문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체의 과정에 은혜의 직접적인 매개자인 직분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는 직분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역으로는 하나님도 직분자를 매개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은혜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은혜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다.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한 인격적 존재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 일반성직자, 감독, 주교, 추기경이라는 계급질서적인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유일한 인격”이다. 교황이외의 다른 인격들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교황이라는 한 인격의 결정을 다양한 인격의 양상(樣相)을 통해서 실행에 옮길 뿐이다. 그러니까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다양한 양상들이 교황 이외의 인격자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황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성육신으로서 연장된 그리스도(the extended Christ)라고 불릴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은 교황은 자기 인식을 철저한 그리스도 따름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따라서 교황이 정상적일 때는 그나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괜찮을 수 있으나, 비정상적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 인격적 주체와 함께 다 무너지게 되니까 말이다. 교리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그 영향력은 실로 심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그 부패되고 왜곡된 양상이 종교개혁시대전야에 만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전복되었다는데 있다. “오직 교회”라는 원리를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로 대체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직제도의 한 대표적인 양상으로 교황제도를 꼽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외치게 된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감독과의 관계성 가운데 의존적으로 실존하는, 무/비인격적 인간의 굴레를 깨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구성원 각각의 인격적 실재를 인정했고, 이로써 교회 구성원인 개개 그리스도인을 인격적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곧바로 설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라 교회를 재형성한 것이다.

인간론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존재와 사유의 양상으로 단순히 존재하던 무인격적인 인간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복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인 셈이다. 중세적 인간이해에 배태된 집단인격의 담벼락을 헐고 개인의 주체성,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인간을 발견하고 일깨운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직접 설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에로 인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진정한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을 꾀한 운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성경”은 성경해석의 주체로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노정했다. 왜냐하면, 과연 직분자로서의 교회가 “성경”과 “전통”을 매개하고 그 의미를 권위적으로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까지 종합할 수 있는 지위를 점하는가에 대하여 종교개혁교회는 의심했고, 직분으로서의 사도직의 계승을 사도적 가르침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내용차원으로 잡아 끌어당겨 높아진 직분을 상대화하여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놓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성경을 사도적 교훈의 전통을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정당화하고, 또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를 세움으로써 “쏠라 에클레시아”의 해석적 권위를 해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위업을 이루었다.

확인했듯이, “오직 성경”은 형식적인 원리이면서 실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여, “오직 성경”을 형식원리로 내세울 경우, 바로 그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실제 삶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실제로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 즉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오직 교회”를 취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종교개혁의 상속자가 아님을 보이거나, 혹은 미성숙한 상속자임을 드러내거나, 혹은 이익에 기댄 기회주의적 처신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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