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절기
자료실 2014. 5. 4. 12:291. 서론: 절기에 대한 혼란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다. 구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절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7월 초순에 맥추감사주일을 지킨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11월 중순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데, 일부 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초막절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더욱이 많은 교회들은 성탄절, 부활절,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과 같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절기’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절기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적실하다. 필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절기, 사도행전에 나타난 절기,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타난 절기를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절기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복음서에서의 절기
예수님은 열두 살 되셨을 때에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참고. 눅 2:42). 이후 예수님은 유월절을 비롯하여 여러 절기들을 지키셨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절기들을 지키신 것은 그분이 구약의 규정들과 이에 기반을 둔 유대의 전통들을 존중하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인이 유대인으로서 그것들을 지키셨을 뿐이지 우리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즉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다 행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태어날 필요는 없으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설교하셨다고 해서 설교자들이 광야에서 설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과 모범에 대하여 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적절히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성경 해석의 주체이시다.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즉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경을 그분 자신의 프리즘으로 해석하도록 요청하신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약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고 한다. 율법조항들에 있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성취 혹은 완성하셨는지를 발견하고 그에 맞게 적용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절기를 이해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관점에서 절기를 친히 ‘해석’해 주셨다. 두 가지 예를 보자.
먼저,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는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6:4).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셨으며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생존하였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께서 광야에 모인 많은 무리들을 풍성히 먹이신 일을 언급하며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온 인류에게 양식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실 생명의 떡은 그분의 살이고 예수님이 주실 물은 그분의 피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7-9장의 이야기는 초막절에 일어난 일이다(7:2). 초막절의 두 요소는 물과 빛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 옆 은 그릇에 붓는 의식을 행한다. 이에 예수님은 물을 소재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신다(7:38). 그리고 유대인들은 초막절 마지막 날 밤에 성전 안 여인들의 뜰에 있는 네 개의 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마당을 밝힌다. 이에 예수님은 빛을 소재로 삼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8:12). 그런 후에 예수님은 실로암 못가에서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초막절의 두 요소인 물과 빛을 예증하신다. 따라서 초막절의 성취자는 예수님이시다.
3. 사도행전에서의 절기
사도행전에 나타난 절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언급은 오순절이다(행 2:1).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서 맥추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은 첫 열매를 먹는 날이다(레 23:20). 아직 완전한 추수는 남아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에 첫 추수한 것을 먹으면서 초막절에 있을 완전한 추수를 바라본다(출 23:16). 구속사적으로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맥추절은 성령의 강림을 통한 영적 추수의 시작을, 그리고 초막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추수를 예시한다.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격적으로 추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7월 초순에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데 이것은 구약적으로나 신약적으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려면 오순절이 있는 5월경에 지켜야 시기적으로 적합하다. 그리고 절기의 이름을 맥추감사주일이라 하기 보다는 성령강림주일이라 해야 한다.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굳이 맥추절을 지키려면 유월절과 초막절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막절과 추수감사주일을 연관시켜서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지 묻고 싶다. 게다가 맥추감사주일의 의미는 절반의 추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래에 있을 완전한 추수에 대한 기대이며 소망이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추수가 시작된 것을 기리는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
4. 바울서신에서의 절기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철저한 유대주의자였으므로 유대의 절기들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하지만 그는 회심한 후에 절기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가졌다. 이는 그가 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는 구약시대의 율법조항들이 신약시대에 더 이상 지켜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지키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입장은 그의 서신들에 많이 나온다. 그의 입장은 사역초기에나 후기에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타난 그의 언급을 살펴보겠다.
우선 갈라디아서를 보자.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그곳에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바울은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한다(갈 4:9-11).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고 비판한다. 이것들은 제사의 시간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구약시대의 제사 시간들을 다시 지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희생제사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헛수고가 될까 ‘두려워한다’고 절박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는 절기를 지키는 일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말한다. 초등학문이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숙한 자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새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옛 시대에 속한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골로새서를 보자.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한다(골 2:16-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일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조항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바울은 율법조항들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율법의 조항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을 암시하고 상징한다는 뜻이다. 실로 율법에 제시된 모든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 사역의 모형이 된다. 따라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더 이상 그러한 모형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것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당시에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절기에 대하여 양분된 견해가 있었다.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비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절기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음식규례나 할례규정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매우 적절한 교훈을 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1-6).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음식을 구별하거나 날을 구별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를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견해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된다. 우리는 절기 때문에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5. 결론적 교훈: 신약이 말하는 절기
우리는 지금까지 신약이 절기에 대하여 말하는 본문들 몇 군데를 분석하였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에서 구약의 절기들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주제는 그다지 논란거리가 아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구약의 절기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의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절기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1) 구약의 절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구약의 절기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그림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사역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구약의 절기들을 부지런히 공부함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의 속성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단히 풍요로운 신학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2)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에는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예표한다. 우리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낼 때 유월절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수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을 보여준다.
3) 맥추감사주일은 성령강림주일로 지켜야 한다.
7월에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은 한국의 실정에 맞추어서 지키는 것일 뿐이다. 필자는 맥추감사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면서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들고 추수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결단해야 한다. 실제로 필자가 시무하는 산성교회는 당회의 결의로 맥추감사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다.
4) 초막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초막절과 추수감사주일은 ‘추수’라는 소재의 연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구속사적으로 초막절이 추수감사주일로 연결 혹은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해를 마쳐가는 시점에 한 해 동안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장려할 만하다.
5) 교회가 ‘기념주일’ 혹은 ‘특별주일’을 만들어서 시행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특별한 날을 만들어서 지킬 수는 있다. 실제로 우리 교단은 총회의 결의로 ‘교단창설기념주일’ 같은 날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날을 구약의 절기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약의 절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교회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 율법적인 의무사항을 따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날들에 ‘절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혼란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념주일’ 혹은 ‘특별주일’ 정도로 부르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며 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정하기 나름이다. <개혁정론 제공>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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