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예수에 관한 복된 소식이고 그 예수를 다시 압축해서 요약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복음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일주일 전부터 부활하기까지의 내용이 대부분 반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악센트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시절이나 공생애 기간의 사역조차 그의 수난과 부활을 전하기 위한 무대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전했고 받았고 알고 붙잡고 있는 복음을 다시 상기하도록 진술하고 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단 두 가지로 정의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전할 기독교의 압축 파일은 바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와 관련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부활의 사건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제 명확히 알아야 한다.

 

침체된 직장생활의 위기를 돌파해내는 힘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부활을 왜 믿는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실연의 상처를 받았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부활을 왜 믿는가? 실직했을 때에도 부활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의 모습이 똑같다면 그가 믿는 부활이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도 문제에 답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아의 문제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자신의 일상사에만 함몰된 채 자신의 위기에 전혀 발언하지 못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은혜받지 못하면 기독교는 달리 은혜 받을 곳이 없다. 나의 위기와 난관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이 발언하지 못한다면 그런 기독교는 믿지 말라. 부활의 능력은 우리 문제는 작게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커 보이게 만든다. 아무리 셀프 토크로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부르짖어봐야 소용이 없다. 은혜 받고자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깊이 침잠하라. 기독교의 은혜의 저수지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십자가 부활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 우리가 그 메시지를 듣고 배우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금 당신의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를 성도의 손에 쥐어주지 않은 셈이 된다. 부활의 종교라는 기독교란 무엇인지,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교인들에게 그 핵심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취해본 적도 없이, 교회는 여가선용으로 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영어회화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영화회화를 가르쳐주지 않고 꽃꽂이를 가르치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학원에 계속 다니겠는가? 거세게 항의하고 환불까지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안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어회화학원에서 영어를 안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매주 교회에서 자기계발이나 성공학에 대해 듣는 데 익숙해졌다. 어떻게 하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지 교회에서 부지런히 듣고 배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우리에게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붙는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인생에 베터리가 되어 돌아간다. 그것이 없으면 말짱 소용없는 일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 그러는데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기독교의 앙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도외시하고는 어디에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긴 시점부터 바울은 곧 미래의 부활에서 현재의 부활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그분이 우리에게 현재 이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비로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우리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사망의 세력, 죄의 세력을 이긴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김의 질서에 참여한 사람이다. 장래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이긴다. 최고 강자 사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다 부활시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이긴 힘을,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베풀어주셔서 우리도 같이 그리스도의 이김에 동참하게 하시고 현실 생활에서 이김을 맛보게 하신다. 현실에서는 물론, 종국에, 그리스도 재림 때 완전히 이길 것이다.

 

- 김응국, 부활, pp 56-62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추ㄹ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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