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로서의 바빙크는 어느 학교에서도 빛날 학문적 선생이었다. 박학하였고, 독서량은 엄청났지만, 잰체하지 않는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터놓고 표현하였다. 성급하지 않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해결책을 알게 되면, 스스럼없이 이를 알렸다.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위장 해결책을 항상 경계하였다.

논리학을 철저하게 공부했기 때문에알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인의 의미도 잘 알았다. 교의학자로서 그는 개혁신학이 칼빈신학과 동일하다는 자세로 캄펀과 암스테르담에서 사역하였다.

단순히 칼빈에게로의 회귀는 아니며, 그 이후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비판도 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1750년부터 경직되기 시작하던 개혁신학을 그는 이런 자세로 활성화하였다. 레이던에서 철학도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의 고유성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독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성과 감정을 충족시키는 '계시 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빈처럼 개혁파 사상 뿐 아니라, 개혁파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름다움의 감동을 봉쇄하는 경건주의적 폐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의 위대한 발견과 유익한 발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재세례파를 거부하는 칼빈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연구와 교수에 지장을 받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 문제, 교회와 국가의관계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전국을 여행하였다.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다.
바빙크는 반대자에 대해서는 항상 포용성을 가지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을 존경하였다. 이들보다 어려운 시기에 칼빈주의의 기치를 올린 흐룬을 더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캄펀과 같은 소도시에서 활동하였으나, 그는 폭넓은 공교회적 정신을 지녔다. 이런 자세는, 그가 1888년 12월 18일에 행한 특강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서 이미 잘 나타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 가정과 사회와 국가, 예술과 학문,전 우주, 바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창조물을 향한 복음이다.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오직 죄에만 대항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정화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은혜의 균형 있는 관계를 제시하면서, 분리측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분리주의의 흔적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온건한 바빙크였으나,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는 카이퍼와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이퍼와도 갈등 관계에 빠졌고, 옛 분리측 인사들과도 등을 지고 말았다.

개혁파원리를 확고하게 따랐던 그가 이 과정에서 그 원리를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그는 교회 정치의 현실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원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도 들어있는데, 교회정치는 종종 이 진리를 철저하게 체험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죄와 은혜, 죄과와 사죄, 중생과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런 표현은 온건한 바빙크가 가장 신랄하게 표현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합동이라는 교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면서, 신앙으로 헤쳐나간 바빙크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출처:
보혈의피 | 2013.09.30. 10:08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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