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개혁주의 신학 2013. 9. 20. 01:37지방교회 주장에 대하여 읽다보면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선생님께서 오시안더의 주장에대하여 분개하고, 몇장에 걸쳐 반박하여 나가시는데,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오늘날의 지방교회 주장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기독교 강요에서 오시안더에 관한 내용 일부를 발취하였사오니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지방교회 주장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괴물을 소개하여 칭의의 교리를 깊은 안개로 휩싸이게 만들어서 경건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고 있으므로 다른 문제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정신 나간 몽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의 사색은 순전히 허망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서 여러가지 증거들을 수집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시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와 하나임을 증명하는데, 사실 이점은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연합의 끈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속이고 마는 것이다. 그가 당면한 모든 난제들을 우리는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은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다 주입시키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니교(Manìchaeìsm)의 사고와 유사한 사고를 형성시키고 여기에 자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허구를 붙여 놓았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 본성의 원형을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결하게 다루기를 원하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살피기로 하겠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이 원리를 잘못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사요 의의 근원이 시요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다른 곳으로 미루어야 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도 독자들께서는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풍성 모두를 주입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그렇게 열렬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삼위(三位)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시안더가 그 사실을 아주 심하게 왜곡시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거하심의 방식을 생각했어야 옳았올 것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니(골 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신성의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어야 옳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올 별도로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올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본질의 혼합을 주장한다. 곧 하나님께서 –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시키셔서 - 우리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실에 대해서도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라나고 그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들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혼합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성령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즉 우리가 중보자의 은혜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하게 혹은 안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본질 속에서 우리와 연합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 그의 본질을 접속시키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시는데 이는 그가 사람으로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그 신성의 본질이 우리 속에 주입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만 말하고 그쳤더라면, 그의 몽상과도 같은 그릇된 사상이 덜 해를 끼쳤올 것이고 그 오류로 인하여 그런 큰 논쟁이 일어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더가 제시하는 이 원리는 마치 오징어와도 같아서 검고 탁한 피를 내뿜어 그 많은 꼬리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유일하게 충만한 확신올 주는 그 의를 빼앗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강력하게 배격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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