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좐 칼빈 2014. 7. 15. 08:49
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2)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앞 문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판을 말함으로써 조롱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거만스럽게 배척하는 만큼 그들 앞에 기다리는 형벌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엄한 심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불신자를 비교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아무 탈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무감각에서 일깨워지고 구원의 주(主)로 조롱했던 바로 그 분이 보복자로 등장하는 날,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이 가르침을 우리도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요한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성취하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를 가리켜 '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온 세상이 뒤범벅인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사실상 쭉정이로 가득차 있음으로써 그들은 쾌락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날, 온 마당에 가득찼던 쭉정이는 이 키의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복음이 각 개인에게서 쭉정이를 제거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많은 쭉정이를 버림 받은 자에게, 신실한 자를 알곡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타작 마당은(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이것은 요한의 말이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백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없어지듯 곧 날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잠시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무용지물로 질식하고 있지만 곧 복음의 강풍으로 제거될 당시에 타락한 교회 상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쭉정이 밖에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알곡이 되기 때문에 쭉정이와는 상관없이 곧 곡간으로 거둬들여질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정화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그 결산을 보고 계시지만, 전체 결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최후의 순간을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신실한 자들은 오늘날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체험할 그 불의의 열기를 현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을 고통으로서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갑론을박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불이라면 이사야 30장33절에 나오는 유황과 사름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은 벌레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벌레'라는 단어가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퍅한 사람들이 쓸데 없이 고민하는 온갖 억측같은 것은 뒤로 제쳐놓자. 이 여러가지 표현은, 우리의 단순한 마음이 파악하는 대로라면, 오늘날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을 초월하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칼빈 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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