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의의 공동체 (교회)’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an clothed in soft raiment? Behold, they which are gorgeously apparelled,

and live delicately, are in kings' courts.
누가복음7:25]

80년 초 로 기억된다.
그날은 더 마음이 무거웠었다.
몇 일전 들은 큰누님 같고 어머니 같은 분의 가정 우환 소식으로 마음을 태우다
전에 읽은 최자실 전도사의 금식에 관하여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직통전화이고 금식을 어떻게 하여야

육과 영에 유익한 금식의 방법에 대하여 써놓은 책의 내용이 떠올라
일주일간의 휴가를 금식하며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을 금식준비 기간과, 금식 후 일주일을 음식을 조절하기로 하였는데
우선 일주일간 금식 준비를 하느라 첫날은 세 끼의 음식을 줄이고
둘째 셋째 날은 세 끼의 양을 더 줄이고 매일 이렇게 음식을 줄이다
금식 이틀 전에는 소량의 쌀로 미음을 만들어 두어 숟가락 먹고
금식 전날에는 쌀을 끓인 물만 몇 숟가락 마시고 허기질 때 마다 물만 마시고
일주일의 준비가 끝나 두 번째로 오산리 순복음교회의 기도원으로 갔다.

첫 번째 갔을 때에는 벌판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던 모습으로
커다란 천막을 쳐서 사람들을 수용했던 것 같으나
많은 사람들이 천막의 예배시간 이외는 언덕의 나무아래서
혹은 바위아래나 위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치며 ‘주십시오!’ ‘할렐루야’ 등 큰소리로 외치듯
기도하는 건지 부르짖던 건지 어느 곳이든 때든 조용한 시간이 없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의 심정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좋고 못 듣더라도

성경의 맥(?)을 찾아야 갰다는 심정으로 도착했지만
마음은 심란하고 주위 분위기도 뒤숭숭하여
동산으로 올라가 밤을 맞으며 침묵으로 기도하다 작은 소리를 내여 기도하고
이내 하나님과 대면하듯 대화하듯이 기도를 하고 지치면 묵상하고

그렇게 밤을 새웠지만 날 이새면 기도의 기억마저도 희미하여 힘이 빠졌고
육체적인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스러웠으나 삼일이 지나고 사일이 되었을 쯤
배고픔과 갈증이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난 후 땅바닥에 자다 기도하다
바위위에 앉아 성경을 읽다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면
주님의 형상을 구름으로 나마 만나고 싶었고 음성을 듣고 싶었으나
흔히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던 음성은커녕
성경을 읽을 때 그 뜻의 더 자세한 설명을 깨달게 되거나
구절이 떠올라
어느 구절이 내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되기를 원했으니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실망한 마음에 몸은 힘이 다 빠져도 눈을 감을 때 마다
꿈속에서 나마 주님을 만나길 바랐으나 그 기대는 바램 일 뿐이었다.
어느 날 눈을 감으면 잠에 취하고 비몽사몽의 상태가 되어
눈을 뜨면 힘이 없어도 억지로 기도를 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하늘은 높아서 푸르고 그윽하여 심오하고 깊어 깊이 마음을 감싸고
솔솔 부는 바람은 미풍(微風)이 되어 시원하고 상쾌하여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눈에 찬 하늘의 모습은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설 으나
언젠가 보았던 경치가 되어 하늘에서는 별들이 닿아오고 있었다.
아니 별들뿐만 아니라 커다란 하늘이 닿아오고 있어 꿈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아도
하늘이 천천히 닿아오고 있어
너무나 웅장한 광경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놀라 몸이 움직일 수도 없이 굳어버렸다.
이것이 무슨 조화(造化) 인가?
내가 죽었나? 생각이 들기 까지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아! 하늘나라구나!
내가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잊었을 뿐
이렇게 닿아 오고 있었구나!
하늘나라를 보는 나의 몸가짐과 과 마음가짐 이런 모든 것들이...
아! 이것이 은총이구나!
내 영혼은 이미 노래를 하고 있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찬송가의 제목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이고
원 제목은 ‘놀라운 평화’ ‘Wonderful Peace’ 이다.
작사 코넬(W. D. Cornell)은 전도사 이었다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영혼의 참된 쉼을
자신의 고백과 체험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이를 예수께 인도하여
그 참 평화를 맛볼 것을 담은 전도의 메시지다.
그가 1889년 가을 감리교 캠프 집회에서 묵상중 하나님의 참 평화를 체험하고
참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 이외는 참 평화가 없음을 체험하여
그 내용을 옮겨 시로 지었으나 그가 쓴 종이를 잃어버리고 잊었고
작곡가 조지 쿠퍼(W. George Cooper)가 캠프에서 우연히 이 종이의 시를 발견하고
감명 받아 즉시 오르간 앞에서 곡을 만들었고
코넬과 쿠퍼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이 찬송이 만들어 졌다 전해진다.)

이는 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고 영혼이 찬양한 놀란 일이지만
작사자 코넬를 통해 가사를 들었고 작곡가 쿠퍼를 통해 음을 들었으니
그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보았듯이 내가 그랬고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고 누려야 할 평화 아니 이미 받은 축복
이를 성경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말씀은 내게 와 있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The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The Kingdom coming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as it is in heaven'
하늘에서 이루워진 것 처럼
재림... 닿아오고 있는 현실 ...

Second Coming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의 헬라어의 파루시아(Parousia)로 사용하였고
‘파루시아’ 라는 뜻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중요한 방문객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의미하며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올 것을 의미하며,
이곳에서 많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이라는 표현을 수없이 하였고 그 말씀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해한다 하면서도
내 신앙에 큰 걸림돌이 된 구절이 이 구절이고
내가 잘난 믿음이라서 환상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내 믿음의 능력 밖의 은총을 입었기에 그것이 문제였고
그로인해 감당 못하는 의무감 같고 아니 내 적은 믿음으로 인해
그 후 신앙생활은 수많은 갈등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왜? 왜? 제게 감당치 못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까?
주님께 원망도 많이 했었다.

성경에 첫 환상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때이다.
[이 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Abram in a vision ,
saying, Fear not, Abram: I am thy shield, and thy exceeding great reward.
창세기15:1]
비전(vision)은
계시(환상)을 뜻하지 일반적인 소망, 꿈, 목표 목적을 뜻하지 아니하고
또 야망이나 도전도 아닐뿐더러 전혀 욕망을 뜻하지 아니한다.
이는 계시(Revelation)을 뜻하는 헬라어의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는
감추어있고 덮어져 있던 것을 열어보는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복음을 의미하셨고
바울은 비밀이라는 말로 복음을 의미하여 설명했듯이
성경은 계시를 전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쓰여 졌다 할 수 있고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과 교제를 위함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20:31]

(그때부터 ‘Vision' 이라는 단어를
아버지께서 ‘감사’ 라는 단어를 성경과 찬송가의 첫 장에 써놓았듯이
나도 ‘Vision' 이라는 단어를 써놓았고 ’샬롬‘ 이라는 단어도 오랫동안 애용하였지만
훗날 그 두 단어가 뜻이 왜곡되어 쓰이게 되고 남발이 되는걸 보면서
변변하지 아니한 마음에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더하여 계시나 환상 이런 체험적인 것을 자랑하기커녕 조심하고
그런 체험의 간증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라도 궁금하지도 않다.
이런 간증도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름 전개하기 위한 수단일 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으나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쓰는 자의 형편을 이해하여 편의를 위할 뿐 체험에 대한 토론은 사양하고 싶다.
나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은사 타령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의(공의)를 성경에서 보아 나누고 싶을 따름이고
자신을 지킬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가졌다 짐작하나 문제 많은 사람이고
특별하여 어떠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도 아니나
우선 나를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하여 성경을 많이 읽었고
미련한 사람이라 더 읽었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지만 진전이 더딘 사람이다.
그래도 만약에 누군가 계시를 받고 싶다면 성경을 읽으라 추천하고 싶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간구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 선입감이나 전통적인 버릇 등을 내려놓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구절을 외우며 처음 성경을 읽듯이 읽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되고 구약에서 구약이, 신약에서 신약이 연결되려면
성경을 읽는 버릇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이미 우리를 향한 계시이기에 특별한 계시는 없다고 보지만
은사란
우리가 성경의 특별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은사뿐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분량을 위하여
결국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 )

그 후 내 가슴에는 한동안 불이 있었다.
불의 할 때는 신앙의 양심으로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교회에 가면 목사의 설교가 공동체를 잘못 설명 하는지 이내 알게 되었고
교회가 십자가 무늬만 남은 공동체로 보였고 교인 중 그중 몇 사람은 신자로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지만 온갖 인상은 쓴 사나운 모습으로
욕심이 가득한 얼굴로 보여 괴로워했고
이 구절로 그 당시 위로를 많이 받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지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나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13]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본 것은 틀림없는 은총을 체험했으나
이 일로 인하여 감당 못할 믿음의 분량으로
내 신앙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인생마저 송두리째 흔들릴지 미처 몰랐다.
물론 그 고통만큼 적은 믿음의 성장을 주셨지만...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우리가 육신이 죽어 돌아가야 할 곳을 본향을 하늘나라라 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며 믿음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본향을 설명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11:16]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w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
에비하신 곳, 천국이다.
천국(Heaven)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는
이루어질 천국
이루어진 천국(예수님의 부활)과
심판으로 돌연히 임할 천국은 하나의 천국이다.
오늘날의 천국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고(‘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지상에 있는 교회(건물이 아닌 성도)에서 이루어지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천국)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려는 하나님의 통치의 연장을 이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도리 즉 공의를 이 땅에 이루려는 교회를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라 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라 하는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각 지체인
각지체이기에 한 지체가 한 지체를 일컬어 자랑하고

중해지고 높아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같은 자녀로
공평하며 평등한 (하나님의 공의처럼)관계이며
교회의 직책은 일하고 섬기려는 지체(肢體)의 기능이고
활동 역할이다.

믿음이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아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아
나의 믿음을 자랑하고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기적과 이적을 보기위하여
치유집회를, 성령부흥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육신의 병을 혹은 영혼의 평안을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육과 영혼에 완전함이 아닌 반쪽의 치우침 이고
그런 집회에서 은사를 받기를 원했더라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듯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의 공동체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를 원하며
온전한 것이 올 때 까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공동체에서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우라는 말씀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요한복음13:34]
계명(Commandment)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를 향한 명령이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척도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우리가 지켜야할 하나님의 공의라
그래서 공동체의 뿌리며 줄기인 근본이라
그래서 믿음의 분량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같은 몸의 지체로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그 만큼의 분량이고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0]
이웃사랑(그것이 전도든 무엇이든)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는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우리가 향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신 주 우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천국의 모형이 되어 지고
진리는 사랑과 함께 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여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어 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늘나라...
오늘날 천국의 모형이 되어야 할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말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광야의 교회에 나갔더냐?
화려한 교회냐?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스런 말을 하는 자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대답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우리 각자 믿음의 분량의 몫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세우는 만큼의 분량은
그 믿음만큼의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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