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뿐인 여자, 그 상처들로 인하여 몹시도 뒤틀리고 꼬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 낮 뙤약볕 아래 우물가에서 낯선 남자가 물을 좀 달라 하는데 차갑게 쏘아붙입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달라 하십니까?”
유대인에게 몹시 반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주님이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내게 생수를 구했으리라.” 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을 계시하자,
“흥, 두레박커녕 바가지도 없이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가요?” 하고 쏘아 부칩니다.
주님이 다시 “내가 주는 물을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시자,
“그래요? 그럼 그 물 내게 주세요, 다시는 여기 물 뜨러 올 필요 없겠네요.” 하고 비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꼬고 쏘는 여자의 말대꾸를 계속 받아 주시며,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계시해 나가십니다.

주님이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남편에게 있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전 남편 없습니다.”
“그래, 남편 없다고 생수 못 주겠다는 거지요?”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놀라고 맙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갈 데까지 다 간 타락한 여자, 동네사람 눈을 피해 땡볕아래 물길러 우물에 나온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 사람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선지자시로군요.”

그런데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생활과 죄를 말갛게 드러내시는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도망하지 않고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말 속에는 그 옛날 북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이를 하나님이라면서 예배하던 우상숭배,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흩어지고 더럽혀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해 온 뼈아픈 민족의 과거, 그 속에서 또한 타락하여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적 비관과 원망과 냉소가 깔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상처투성이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기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 때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글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는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안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예표였습니다.
성막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겠지요.”
사마리아 여자가 그 비참한 환경과 삶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 그의 질문과 말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로라.”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겠습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라니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난리를 합니다.
그 때까지의 좌절과 아픔과 차별과 모멸과 수치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참 생수요 진리가 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켜버린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구원을 기다린, 상처뿐이었던, 주님을 만난 여인의 변화요 승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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