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를 보여라!


요한복음 5:31-32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고 살기등등하게 따지고 덤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 같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니 나도 죽은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심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모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모든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맡긴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심판은 생사화복,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 곧 우주의 주재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요 주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면서 하신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시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기적과 표적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그것은 참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행하셨다면 진작 마귀가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드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병고침과 살리심과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증거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다만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요 광야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그 보내심의 증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마침내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눈을 치켜뜨고 죽이겠다고 덤비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증거를 보이지 않으시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광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으니 예삿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로 나타내셨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시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을 것이며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믿음은 우주의 비밀입니다.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네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증거를 보여랏!”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 데리고 와서 보여라. 아니면 네가 선악과 먼저 따먹어 봐라. 어디 하나님과 같이 되는지 보자.”
아담과 하와가 진작 이렇게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뱀을 믿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 유대인들이 뒤늦게 똑똑해져서(?) 정작 예수님께는 안 속겠다고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똑똑하게도 아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아, 그 때 뱀을 못 박아 죽여 버렸었더라면, 그걸로 뱀탕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 아니 죄인들에게,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예수님이 쓰시거나 보이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곧 성경,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막상 눈앞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고 초자연적인 기도응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것이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과 응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씀이 증거입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 말씀,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감으로써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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