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박영돈 목사 2015. 1. 2. 04:27

지난 주일 설교했던 것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본문인데 자주 오해되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설교라서 참고하시라고 시원찮은 내용이나마 올려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6



바울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울 구원론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바울이 말한 구원의 핵심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들릴 뿐입니다. 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구원이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 신자의 구원은 미완성이며 자신의 구원을 미리 확신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셈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심대하게 위협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이지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값싼 은혜와 거짓구원의 확신을 양산하는 무율법주의 폐단을 낳는다면, 후자는 신자들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며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게 합니다. 


전자가 구원의 즉각적인 면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구원의 점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을 무시한 채 그 점진적인 측면에만 역점을 기울인 우를 범한 것이지요.


바울사도의 가르침에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과 점진적인 측면이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위(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행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가 없이 온통 죄로 가득한 사람이라도 이 예수님의 의로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즉시로 신자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믿음은 신자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여 하나님이 신자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너희가운데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희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기쁘신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를 세워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우리로 인해 찬양과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효력과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이루어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to work out what God works in us). 이것이 신앙생활, 성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행위구원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내포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 안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그 목표를 향해 진행시키는 말씀입니다. 이루라는 원어의 의미는 “결론, 마지막 단계로 계속 발전시키라”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 떠 맡겨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진행시켜 완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보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과 유일한 근거는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열심과 오래 참으심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과 성화는 우리의 시원찮은 열심의 산물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무한한 열심의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이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냉랭하고 강퍅한 마음에 절연이 되어 잘 전달되지 않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이루거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자유로운 의지를 상실한 로버트나 꼭두각시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자로 하나님과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는데 성령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성화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지런하게 합니다. 피동적으로 손 놓고 가만히 있게 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게 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의 영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 열정과 소원을 불붙이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들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아들의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성령,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사무치는 소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에 온통 삼킨바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성부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려는 불타는 열심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비록 그 뜻이 자신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일일진대도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의 덕을 보는 것,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인데도 그 뜻을 이루기를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영적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이런 평생의 소원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God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소원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하십니다. 


선한 의지와 소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선한 의지와 마음은 있지만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우리 의지의 연약함입니다. 


바울사도가 롬 7장에서 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을 본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선한 의지만으로는 결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 밖에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많은 세력들이 그 의지를 압박하여 무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성과 죄의 습관, 죄의 관성이 우리를 우리의 선한 의지에 거스려 죄로 치우치게 합니다. 죄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악으로 치우치기십상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밖의 수많은 환경적 방해와 난관이 우리의 선한 의도를 번번히 무산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넋두리가 아직 은혜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별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하고는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원하지 않고 희미하게 원하기 때문이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나누인 두 마음을 품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해서, 또는 죄와 사탄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유혹이 너무 많아서, 이 세대가 악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No excuse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우리의 선한 의지를 거스르는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죽이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잔재해 있는 부패성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아직은(not-yet) 누리지는 못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미(already) 풍성히 임한 자유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이 구원의 목적, 즉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로 확보하신 모든 새 언약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시고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갈망과 무한한 열심과 인내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내가 혹시 거스르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자기만 바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빌 2:4에 자신의 일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이의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도록 자신이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성숙과 성화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섬김과 기도와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런 공동체적인 구원과 성화를 의미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며 사랑의 화평의 열매가 가득하여 천국을 맛보며 증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거스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가지신 계획과 소원,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모든 고난과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간절한 소원과 뜻을 거스르고 그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고 복음의 빛을 현저히 가리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신앙의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한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며,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도 믿고 떠든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들의 확신은 자꾸 흔들어대는 반면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구원의 목표가 자신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분명한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생활을 했어도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는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났더라도 심각하게 타락한 교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봐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마귀의 교활한 수법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는 도리어 안일하게 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자신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참된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면서 온갖 부패와 방종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과 교인들로 큰 군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자신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 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 안에 시작한 구원을 결국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 1:6에서 그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거듭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서신은 온통 이런 확신에 찬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행여 자신을 버림받게 하실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하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경건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오는 율법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함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할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징계 받을까 두려워하는 율법 아래서 떠는 종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깊은 경외심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비천하고 추악한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아빠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 거룩한 임재 속에 산다는 의식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배반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가장 기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한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과 슬픔이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무시하고 사는 수많은 교인들, 교회들을 보면서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르고 살므로 우리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으로 인해 생명의 말씀이 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제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진저리를 냅니다. 우리의 말과 너무도 모순된 삶을 보며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말씀이 짓밟히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로부터 빼앗아 말씀을 잘 청종하고 순종할 이들과 민족에게로 옮겨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깊은 각성과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계속 지금처럼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박영돈 목사님

출처: 물과피와성령/새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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