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틱 그리스도인과 십자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2009. 4. 10. 02:19사진: 손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을 보여주는 콥틱 그리스도인(십자가가 많이 흐리네여..)
저는 지난 성지순례 기간에 이집트에 있는 ‘콥틱 그리스도인’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슬람국가인 이집트 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기독교인이 있었고, 그들을 일컬어 ‘콥틱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이집트 내에,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전성시대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이집트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합니다.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각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이때 이집트에도 복음이 들어왔으며, 콥틱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집트 내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 안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매한가지, 무술림들의 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합니다. 역사에 박식한 한국 안내원이 들려 준 콥틱 그리스도인들 삶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슬람의 무술림이 이집트의 주도권을 잡은 지난 천이백 여년 동안, 사회의 모든 지도권,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두 무술림이다 보니, 기독교인들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선뜻 좋은 직장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정 수입근원을 지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정부로부터 보조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지목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은 시내에서 살지도 못합니다. 외각지, 그것도 지난날, 쓰레기 수거지로 쓰이던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 땅굴 같은 것을 파고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물 공급도 잘 안 되니 깨끗이 씻을 수도 없습니다. 그 동네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대대로 그 신앙을 전수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물림한다고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의 팔목에다 십자가표식의 문신을 새겨넣어 준다고 합니다. “너는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겝니다.
때마침, 우리 일행 앞에는 팔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은 한 초라한 할머니가 자신의 팔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인가 열심히 전하려 했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바싹 마른 그녀의 손바닥에 1달러 지폐 한 장을 쥐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콥틱 그리스도인..., 슬프도록 아름다운 영혼들입니다. 무섭도록 놀라운 충정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수고는 분명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초라한 그들 앞에서 상대적으로 내 영혼은 너무도 초라하고 너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 십자가 문신을 손목에 새겨넣는 것만큼은 결코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문신이 되었건 다른 어떤 형태이건, 몸에 문신을 새겨넣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손목에 문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의 뜨거운 불로 각인 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신학자, 또는 그들을 추종하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신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 그 자체마저 금기시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을 지키려고 하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이단시 하기도 하며,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극단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는 죽음의 표식일 뿐,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사랑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22: 19절)” 십자가에서 찢기는 것을 기념하라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에게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3-24절)”.
물론, 고난주간도 다른 여러 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에서 제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는 한, 1년 중 어느 한 주간만이라도 세상 향락을 사랑하던 마음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견해입니다. 이 고난 주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큰 것은, 바로 주께서 너와 나를 위하여 찢기고 상하신 그 고통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마음을 찢으며, 죄의 자리에서 돌이켜 결단하는 재헌신의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겸허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콥틱 그리스도인들처럼 십자가 문신을 몸에 새겨넣어서도 안 됩니다. 또 십자가를 신성시하거나, 우상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 그 크신 사랑을 기념하는 한 주간이 정해져 있는 것, 그 자체마저 인정하지 않는 마음, 그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한 신앙의 마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죄인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내어주신 그 핏빛 사랑마저 기념하지 않겠다고 고집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할 때, 그분의 죽으심과 사랑, 그리고 다시 오심을 바라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으로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53: 5-6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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