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적 성령론의 발전

 

마이클 헤이큰(Michael AG. Haykin)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 전통은 성령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이 성령론적 열정의 주요근원은 바로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계속해서 매우 독특한 관심'을 보였던 존 칼빈 자신이었다. 비범한 미국 장로교 신학자인 워필드는 심지어 칼빈을 탁월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영어권 세계에서 성령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심오한 관심은, 청교도와 그들의 계승자들, 여러 칼빈주의 분파들, 그리고 18,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과 관계된 개혁주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칼빈의 후예들은 성령의 사역을 논하면서 죄인의 모든 구원 사역에 관계하시는 성령의 주권을 강조했다.

 

스튜어트(Stuart) 왕조 시대의 초기 청교도들 중에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영적인 용기와 담대함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유일한 방편이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이 영적인 강력함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부지런하게 사용해야 할 경건의 다양한 방편들도 주장했다. 이런 훈련들 가운데는 말씀을 들음, 성례 참여, 기도, 묵상, 대담, 성도의 교통, 선을 행하려는 특별한 결심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은혜의 방편이나 영적 훈련들이 신자의 영혼을 살찌우고 회중의 삶의 내적 성장을 이루는 데 완전히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만이이 일에 충분하신 분이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영국의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존 서클립(John Sutcliff), “성령의 감화들은 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다. 만일 성령의 감화들이 억제된다면, 성례와 같은 신적인 의식들은 텅 빈 수조와 같고 영적 은혜들은 시든 꽃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표적인 개혁주의 전통들은 역시, 존 프레스톤이 제시한 은혜의 방편들을 제외한 채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17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인 벤자민 키치(Benjamin Keach)1681년에 퀘이커 교도들을 빗대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빛과 권세를 소유했다고 확신 한다. 그러나 실상 이 모든 것들은 망상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자랑하고 자신이 성령을 소유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또한 그들은 주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그분의 말씀 가운데 제시된 하나님의 복된 은혜의 방편들과 기관들을 매도하고 폐기 처분 한다‥‥‥그러나 성령께서는 합당한 경계선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항상 영적인 경로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한 경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공적 예배와 사적 예배이다.”

 

이것이 성령이 원하시는 전통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청교도인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는 항상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한다.

 

앞에서 인용한 프레스톤의 글에 몇 가지 경건의 방편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중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네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들은 바로 성경, 기도, 성례와 영적 교제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영성(성경)

 

종교 개혁은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신학, 즉 영성을 계발시키기 위해 상징과 형상들을 사용하는 그들의 신학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출판 인쇄술을 충실히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영성 계발의 가장 주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월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의 생애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틴데일은, 1520년대 중반부터 1536년에 순교할 때까지 바로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틴데일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믿었다. 그는 1530년에 창세기 번역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을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길을 밝히 보여 주는 빛이다. 또한 성경은 모든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요새이며,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게 하는 위로이며, 번영 가운데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하는 두러기다.”

 

이 종교 개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 중심의 영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인물이 바로 18세기 미국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틴데일과 마찬가지로 에드워즈 역시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사역자들이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 하는 빛이며, 회중들에게 높이 들려 선포해야 할 빛이다. 또한 성경은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마음까지도 타오르게 하는 불과 같다.”

 

따라서 성경 묵상이 그의 경건의 핵심이었음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친한 친구이자 최초로 그의 전기를 썼던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에드워즈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가 아는 한, 그의 비밀은 기도에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묵상하는 데 있었다‥‥‥그에게는 지식에 대한 비범한 목마름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었고, 특별히 신학에 관계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욱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고,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 성경에 대한 그의 비범한 지식은 그의 설교와 모든 저작에 나타나 있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쏟았던 열정은 그의 원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전 생애에 나타난 성경 묵상의 훌륭한 열매는 여백 성경이라고 알려진 에드워즈의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페이지에 한 장의 여백이 삽입된 작은 성경책이다. 그리고 이 여백들은 에드워즈가 인접한 본문에 대한 주석을 기록할 수 있도록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에드워즈의 여백 성경에는 1730년부터 1758년까지 그가 기록한 전 성경에 대한 일만여건 이상의 주석이 담겨 있다.

 

2.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기도)

 

개혁주의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또 다른 방편은 바로 기도이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굿윈이 잘 지적했듯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위대한 요소이다.’ 그린햄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신자의 견인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전투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으로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1662년에 쓴 내가 영으로 기도하리라」』 I Will Pray with the Spirit 라는 소책자를통해서 기도에 대한 그의 분투를 묘사한 바 있다.

 

번연은 오직 성령만이 기도를 시작한 신자를 인내할 수 있게 도우시는 유일한 분임을 강조했다.

 

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해야만 하는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겠다. 가련하고 사리 분별이 없으며 육적인 당신은 나의 이 이상한 생각을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몹시도 싫어했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분과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했으며, 마지못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고 주의 도를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했다(86:11 참고). 그러나 많은 경우에 나는 눈이 멀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너무나 무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직 성령만이(은혜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이다(8:26 참고).

 

, 기도 시간에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은 너무나 많다.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미끄러지게 하는 샛길과 뒷길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언변에 능통하면, 얼마나 많은 교만이 밀려오는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얼마나 위선적으로 기도하게 되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간구하는 심령’(12:10)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사이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적은가!”

 

이 문장은 청교도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를 보여 준다. , 우리는 여기서 투명한 정직함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번연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옛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기도를 통해 인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번연이 앞서 한 말 바로 다음에 아래와 같이 덧붙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붙잡으실 때, 우리 마음은 비로소 기도하게 된다. 진실로 그 전까지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많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도의 훈련을 통해 인내했다는 것을 증거하며, 기도의 의무가 순전한 기쁨으로 바뀔 때에 절묘한 기쁨이 임하게 됨을 알게 해 준다.

 

존 번연의 좋은 친구였던 존 오웬은, 에베소서 2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천상의 평안함과 영혼의 만족스러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며 그 어떤 지성으로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나아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되는가!”

 

3.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으시기를 기뻐하심”(성례)

 

칼빈주의자들이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부분은 주의 만찬이다. 이것은 최근에 주의 만찬을 중요한 영적 훈육으로 생각하지 않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의외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성찬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신자들의 영혼을 먹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18세기 칼빈주의적 고찰의 실례 두 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이 항상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많은 작품을 남긴 듀턴(Anne Button)18세기 주요 복음주의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그는 주의 만찬이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기를 기뻐하시는 식탁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또한 이 은혜의 방편이 너무나 훌륭해서 주의 만찬에서 신자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자아‥‥‥,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임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허락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묘사했다.

 

이 시기의 다른 개혁주의 신자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진술을 약간 지나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듀턴이 성찬을 그들의 설교와 같은 수준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구속자와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방편이 되는 성찬에 대한 듀턴의 견해를 기꺼이 인정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서가 18세기 초반 런던의 칼빈주의 침례교회에서 목회했던 요셉 스텐네트(Joseph Stennett)목사의 찬송시인 복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며(the Sufferings Of Our Blessed Saviour Jesus Christ)’에서도 발견된다. 스텐네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마땅한 '영구한 기념'으로서의 성찬에 대한교회의 찬미를 모사한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합당한 상징들 또는 형상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징들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풍성한 포도주로다.

이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그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요!“

 

스텐네트는 성만찬 자리에서의 식사와 관계되는 것이 믿음임을 명료하게 하면서도, 특별히 그의 언어는 주의 만찬이 신자에게 있어서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방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 하나님의 식탁

오직 유일한 신적인 식탁에 우리의 믿음이 있나니

믿음으로 볼 때,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가장 고상한 포도주로다!“

 

4. “우리의 신앙을 유지시키는 최고의 도움 가운데 하나”(영적교제)

 

신약성경은 고독한 기독교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영적인 힘의 위대한 근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우정과 교제이다. 부당하게도 칼빈은 차갑고 가혹하며 사랑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그는 교제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우정의 풍성한 진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 개혁주의 역사가인 리차드 스토퍼(Richard Stauffer)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디도서 주석의 머리말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기음 파렐(Guillaume Farel)과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와의 우정을 다음과 같이 찬미한 바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목회 사역만큼, 또한 매일의 삶만큼 이렇게 깊은 우정을 나눈 사람은 없었다. 나는 파렐과 비레, 이 두 사람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질투나 시샘이 없었다. 그들과 내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형제 같은 우정은 세 사람의 빈번한 서신 왕래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보낸 서신들을 통해 신학적 쟁점들과 교회의 문제점들을 솔직하게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1552127,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파렐의 지나치게 긴 설교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칼빈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자네는 종종 설교를 지나치도록 길게 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겠다고 고백하였지.” 그리고는 사탄이 설교 시간에 대한 파렐의 실수를 파렐의 사역으로 낳은 많은 선한 일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설교의 시간을 좀 줄이라고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당시 칼빈의 설교는 1시간~1시간 30분 정도였지만 칼빈의 친구 파렐은 3~4시간 정도 설교를 했다)

 

개혁주의 신자들이 우정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하겠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 에드워즈의 8명의 딸들 가운데 셋째 딸로서, 식민 시대에 뉴저지에서 믿음 있는 가정주부로 살았던 에스더 버(Esther Burr)의 일기를 한번 살펴보자. 1750년대 중반에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아주분명하게 선언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제외한다면, 친구들이나 단체의 모임이나 대화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는 것은 없다.”

 

그녀는 훗날 프린스턴 대학의 교장이 된 아론 버(Aaron Burr)의 아내이자 두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바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했다. 그리고 그릴게 함에 있어서 친구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임을 깨달았다.

 

1756123일의 일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친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비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 하나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비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있는 삶은 진정한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에스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복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에스더는 왜 친구와의 우정에 그토록 큰 가치를 부여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대화가 영적 성장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확신은 그녀가 1755420일에 가장 친한 친구인 사라 프린스(Sarah Prince)에게 쓴 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랑하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나는 당신과 같이 속마음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매력적인 친구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스러운 예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담화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 외에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일에 게으른 것은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지요!”

 

여기서 에스더가 말한 종교적 담구와 우정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친구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삶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투명하게 여는 사람들이다. 에스더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서로 아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털어놓은사람들이다.

 

신자는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과 격려를 얻는다. 친구들과의 영적 대화를 가리켜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할 때, 에스더는 분명히 이것을 은혜의 한 방편, 즉 그리스도인들을 구세주와 교제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5. 은혜의 또 다른 방편들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은혜의 방편을 존중해 왔으며, 다른 방편들도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의 칼빈주의자 찰스 스펄전은 1868년 그가 출판한 잡지인 검과 흙손(The Sword and the Trowel)에 기고한 논문에서 침묵과 금식과 기도로 보내는 고독한 시간을 옹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이 네 가지 방편들,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영적 교제를 부지런히 사용하고 이 방편들에 헌신한다면,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의식 있는 존재로서 합당한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방편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를 소원한다!

 

질문:

1. 존 서클립이 성령의 감화들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라고 말한 것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표현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고, 아니라면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2. ‘말씀의 영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 개혁주의 전통은 왜 리차드 그린햄의 표현대로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인가?

 

4. 우정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더 성숙해지게 만드는가?

 

5.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 속에서 유익했던 은혜의 다른 방편들은 무엇인가?

 

마르투스선교회에서 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 Recent posts